음악이야기/즐~ 재즈

[재즈입문] 비밥- IV

이 상용 2009. 5. 6. 18:28

 

 

 

비 밥의 혁명 "나는 이런 연주를 하고 싶다!"

찰리 파커의 달콤한 알토 색소폰, 디지 길레스피의 쉴세없이 불어대는 트럼펫, 오스카 페티포드가 연주하는 파워감 넘치는 콘트라베이스, 버드 존슨의 포효하는 테너 색소폰, 셀로니어스 몽크의 이지적이고 간명한 피아노 플레이, 케니 클락과 맥스 로우취의 변형화된 드러밍이 다 이 범주에 속해 있었다.


Dizzy Gillesple, 1948/Wide World Photos"모던 재즈"라는 단어는 별다른 의미 없이도 당연하게 사용되고 있으나 막상 일체의 "모던 재즈"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생각해 보면 음악적 용어도 아니고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은 더우기 아니다. 마치 클래식 음악에서 드뷔시 이후를 근대 음악이라고 부른다는 것과 비슷하고 오히려 저널리스틱한 명칭인 것이다.

 

대개는 1950년경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말로 일반적으로는 40년대 초에 일어났던 "비 밥" (혹은 "밥", "리 밥")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고 있는 재즈를 흔히 "모던 재즈"라고 부른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오네트 콜맨으로 시작된 "뉴 재즈"는 "모던 재즈"에 포함시키지 않기도 하고, 어디까지나 "뉴 재즈"라 일컬어 구분짓고 있으나 "뉴 재즈"도 "모던 재즈"에 포함시키고 있고 금후 어떤 형태의 재즈가 나타난다 해도 그것은 모두 "모던 재즈"에 포함된다. 결국 "비 밥" 이후의 재즈는 모두 "모던 재즈"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왜? 비 밥 이후를 모던 재즈라고 불러야 하는가? 예컨대 저널리스틱한 호칭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렇게 된 이유가당연한 것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모던이란 말은 "현대의" 또는 "근대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거기에 왜 비 밥은 근대적인 것인가라는 점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비 밥은 흔히 "비 밥의 혁명"이라고도 불리어진다. 스윙 재즈 이전의 재즈와 비교할 때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한가지 예로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에 의해서 명확한 즉흥 연주의 방법이 수립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곡을 구성하는 화음(즉, 코드의 전개)으로부터 음계(스케일)를 이끌어 내고 음계에 의해서 즉흥 연주를 하게 된 방법은 비 밥 이후의 재즈에는 하나의 기본 형식이 되었던 것으로 특별히 다른 뉴 재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런 배리에이션(Variation)에 의해서 연주되고 있다고 보아도 별 이견이 있을 수 없고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다 또 리듬 면에서는 케니 클라크와 맥스 로우취가 레귤러한 4비트를 드럼의 탑심벌로 연주하고 킥 드럼 (베이스 드럼)은 특수한 액센트를 주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부터 오프 비트(off beat)의 감각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또한 여러 형태로 변화를 가져와 변박자 등을 거쳐서 현재의 복합적 리듬(Poly Rhythm)이나 프리 리듬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비 밥은 진정으로 오늘 현재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밝힌 시대적인 요구였으며 비 밥 시대는 오늘날 재즈의 기초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더우기 또 다른 대단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점이 있다. 그것은 비 밥 시대에 일어난 뮤지션 자신들의 의식에 대한 대변혁이라고 하겠다. 비 밥 시대가 되어 재즈 뮤지젼들이 근대적(모던한)인 정신에 각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의 재즈 뮤지션들은 댄스 뮤직에 종속되어 있다든지 엔터테이너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런 예가 대다수였다. 비 밥의 시대를 맞이하여 재즈 뮤지션들은 자립의 정신 자세를 갖고 예술가(Artist)로서의 개안을다운 비트 클럽, 1948이것은 대단한 사건이요 혁명이었다. 댄스 뮤직으로서의 재즈와는 확실한 결별이요 위상을 구축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이 무렵 재즈도 또 다른 근대 예술과 동일한 정신을 확립하며 창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 밥은 음악적인 혁명이었던 것과 동시에 정신적인 혁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것은 결코 스윙 재즈 이전의 재즈가 비예술적이고 비 밥 이후가 예술적이라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비 밥 이후 재즈 뮤지션이 예술가로서의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재즈를 감상할 때 한가지 조심해야 하지 않으면 안될 점은 재즈 뮤지션이 걸어온 길을 음악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으로부터 음악적 이론을 추출하여 새롭고 진보적인 이론에 의해서 재즈가 전진 내지는 발전해 왔다고 고려되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미 재즈가 걸어 온 길로는 다시 가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 정도로 분석해서는 새로운 재즈는 만들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양 음악의 경우는 확실하게 새로운 이론이 새로운 음악을 만든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진보되어온 현대 음악이 지금 막다른 골목에서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재즈를 서구적인 발상법으로 취급하면 또 다른 하나의 위험을 내재하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건너와 개화된 재즈는 서구 문화와는 이질적인 문화라고 고려될 수 있다.

 

또 하나 동양 문화의 존재가 고려되어도 좋지만 재즈, 그 것을 만약 흑인들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흑인의 문화는 한마디로 정서(에모션) 우선의 문화라고 생각된다. 재즈 뮤지션들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은 에모션의 힘으로 변화 대응한다. 만일 이론적인 정직함과 정서의 요구를 앞세운다면 그들 흑인 재즈 뮤지션들은 주저하지 않고 정서의 요구에 따를 것이다. 그러나 백인 재즈 뮤지션이 자주 실패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서구적인 발상법에 의해 이론의 새로움이나 진보를 재즈의 진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병폐이다. 필링과 에모션이 요구하는 힘에 의해서만 재즈는 발전해 온 것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수법 내지는 방식을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던 재즈도 또다시 이런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던 것이다.


30년대 스윙 재즈에 대체되어 40년대에는 모던 재즈 중의 대표적인 스타일 "비 밥"이 유행하였다. 비 밥은 모던 재즈를 알기 위한 무시될 수 없는 스타일이지만 같은 시기에 재즈계는 점프 밴드(Jump Band)라고 하는 별동 부대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일세를 풍미한 스윙 재즈도 40년대에 들어와 쇠퇴를 보이기 시작했고 41년 말에는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으며 징병을 위해서 젊은 재즈 뮤지션들도 전장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 때문에 빅 밴드도 멤버의 고정 출연이 어렵 게 되었다.

 

각종 스포츠 경기에서 부상 선수가 속출하면 만족스런 시합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이 이런 징병에 의한 멤버 이탈은 빅 밴드의 음악성 뿐만 아니라 밴드의 유지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 2개의 음악 저작권 대행 기관인 ASCAP(American Society of Composers, Authors and Publishers)과 BMl(Broad- casting Music Incorporated) 사이의 저작권 분쟁에 부가해서 제임스 시져 페트릴로를 위원장으로 하는 AMF(American Music Federa tion)와 레코드 회사에 의한 대립도 일어났다. 특히 AMF와 레코드 회사들은 42년 8월에 뮤지션 측에 의한 제1차 레코딩 스트라이크로까지 발전해 버렸다. 그 때문에 많은 밴드가 레코드 취입 찬스를 잃고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ASCAP과 BMl의 관계를 잠시 알아보기고 하자. 미국의 음악 저작권 관리 단체, 음악 출판사는 계약된 작곡가, 작사가의 판권을 갖고 그들 작품의 악보가 팔린다든지, 콘서트나 라디오 방송국 등에서 연주된다 할 때 일정한 요율의 요금을 징수하여 마진을 떼고나서 작곡가, 작사가에게 인세로 건네주는 것이다. 대개의 음악 출판사에는 손수하기에 벅찬 업무를 일괄해서 수행하고자 음악 출판사가 연대해서 1914년에 설립한 것이 ASCAP이다. 라디오 전성 시대가 되어 방송으로 연주되는 사용료가 막대하게 되어 ASCAP과 라디오 네트워크(CBS등) 의 대립이 격렬하게 되었다.

 

ASCAP에 내는 사용료의 인상을 계기로 라디오 네트워크는 새로운 저작권 관리 단체인 BMI를 설립하게 되어 ASCAP과 BMl 라디오 네트워크 사이에 1940년부터 42년까지 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유명한 작곡가 작사가를 포진하고 있는 것은 압도적으로 ASCAP 측이었지만 그 사이 라디오측은 신참인 BMI의 곡만 방송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재즈의 경우 방송 중에 있는 라이브 연주에 ASCAP측의 곡의 멜로디가 나오는 것은 곤란하게 되어 방송에서의 애드립이 금지된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도 얽히면서 빅 밴드의 황금 시대는 막을 내리고 스윙 재즈는 쇠퇴 일로에 놓이게 되었고 재즈사의 뒤안길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왕성하지는 않다. 그래서 마침내 비 밥의 시대가 찾아왔다. 이미 밥기에 모던 재즈에 직결된 재즈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으나 그 전에 또 하나의 조용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으니 소위 점프 밴드였다.

Paul Whiteman in Berlin캔사스 시티 출신의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제이 맥선" 악단이 블루스와 부기 우기 색이 강한 터프한 음악성을 갖고 있었고, 같은 컨셉트를 가진 흑인 악단이 그 외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앨 쿠퍼"의 "사보이 설턴즈", "어스킨 호킨스" 악단, "럭키 밀린?quot; 악단 등이 있었다. 이 러한 악단들은 흑인 위주의 댄스 감각에 근간을 두었고 스윔 재즈와는 전혀 다른 중심으로 인기를 더 높였다 리듬 면에서만 아니고 피쳐링된 색소폰 음색과 콜맨 호킨스를 능가하는 탁한 음색과 강렬하게 불어대는 스타일이 빈번하게 연주되었으며 이런 스타일을 "항킹Honking)"이라 했고, 항킹 스타일의 연주자들을 통칭하여 "항커(Honker)"라고 불렀다.

 

흑인 비브라폰 주자 라이오넬 햄프턴 악단의 "플라잉 홈"에서 주목받는 일리노이 쟈케(ts). 아네트 캅(ts) 등도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개성을 가진 주역의 면면이 고빅 제이 맥닐리(ts) 등은 정말 항커로 불러도 손색없는 사람이다. 이런 색소폰 스타일은 후일 R&B(리듬 앤 블루스), Rock & Roll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되었다. 또, 점프 악단에는 "샤우터(Shouter)"라는 남성 가수가 많이 공연한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가수에 따라 미묘하게 개성은 다르지만 남성적이며 씩씩하고 늠름한 가창 스타일로 블루스, 발라드를 노래한 시절이 있었다. 월터 브라운, 지미 위더스푼(제이 맥션 악단), 에디 크린헤드 빈슨(엘링턴 악단과 쿠티 월리엄즈 악단), 와이너니 해리스(럭키 밀린더 악단) 등 몇몇 샤우터의 개성과는 조금 다르지만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지미 러쉼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솔로로 활동을 한 빅 죠 터너, 로이 브라운 등이 유명하고 이런 점프 밴그 중에서 등장한 루이 조던 (as, vo)은 자신의 그룹 "티파니 파이브"로 흑인 관중의 심성에 어울리는 히트곡을 차례로 내놓아 전후의 R&B와 블루스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보통 블루스의 장르로 보는 T. 본 워커(g, vo)도 넓은 의미로는 점프 밴드에 입단했으면 좋았을런지 모르겠다. 당시는 블루스와 재즈 사이에 명확한 한계가 없었음을 부연한다.


그러면 모던 재즈뿐만 아니라 총체적 재즈의 백미 "비 밥"의 시대이다. 뉴 올린즈에서 탄생된 이래 가장 커다란 변혁이 재즈에 도래되었지만 비 밥 이후의 재즈를 모던 재즈라고 부르기까지의 재즈와 구별하게 된다. 들어서 비교해 보면 알지만 멜로디, 리듬, 하모니(로드의 진행), 애드립, 어느 것을 다루어도 비 밥 혁명에 의해서 재즈는 복잡하게 되었다. 그런 영향으로부터 그때까지 댄스 음악으로만 다루어졌던 재즈는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서의 측면이 강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재즈는 예술 음악이라는 감각과 등식이 생기게 되었다.

 

댄스 음악이란 어떤 의미로는 "고객은 왕이다"라는 음악에서 "나는 이런 연주를 하고 싶다"라고 하는 연주자 주체의 음악으로 변화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하게 음악적인 측면으로서의 새로움의 추구가 비 밥 혁명의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 의미이다.


그러면 비 밥 혁명에 이른 음악적 탐구의 현장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젊은 재즈 뮤지션에 의한 "애프터 아워즈의 잼 세션"이 그것이다. 애프터 아워라는 것은 직업적인 연주(물론, 댄스 뮤직으로서의 재즈 연주를 말함)가 끝난 후의 시간을 말한다. 그리고 "잼 세젼"이라 하면 컨셉션이 맞는 뮤지션들이 모여 블루스라던가 스탠더드 같은 지금가지 해왔던 음악을 소재로 그들의 실력을 보여 준 연주인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연주에서는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연주인들이 모였고 화음의 진행은 이렇게 교체된 사람들이 재미있다라든지 화음 진행이 보다 참신한 애드립들 사용하는 사람이든지 드럼과 베이스의 핫 테이스트를 이런 변화와 리듬에 한층 더 스피드 감이 나오든지 여러 가지로 궁리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세션의 장소로서는 너무나 유명한 한 곳이 뉴욕의 할렘에 있던 "민튼즈 플레이 하우그"였다. 전기 기타를 이용하여 참신한 연주를 했던 찰리 크리스찬, 찰리 파커(as), 디지 길레스피(tp), 셀로니어스 몽크(p), 케니 클락(ds), 등의 생기 발랄한 청년들이 41년경에 모여들었다.

 

수많은 세션 후 43년의 "얼 하인즈" 악단. 44년에는 재즈사의 첫 빅 비밥 밴드라고 할 수 있는 "빌리 엑스타인"악단(양 악단에 파커와 길레스피가 참가했음)이 등장하고 그리고 45년에 파커가 자신의 캄보 밴드를 이끌고 있던 시기로 이 때 비 밥은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파커의 캄보 밴드는 알토 색소폰,트럼펫, 피아노, 베이스, 드럼의 퀸텟이었다. 연주의 패턴은 소재가 된 곡의 테마를 제시하고 그 다음 그 곡의 화음 진행에서 멤버 각자가 애드립을 연주하고 또 다시 테마를 제시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편성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는 것이므로 그 후 관악기를 도입한 캄보 밴드 연주 스타일은 대개 이 패턴을 기본으로 했다.


비 밥은 이러한 이론, 기술적인 음악 추구의 산물임과 동시에 재즈의 혼혈 음악성의 재확인이라는 측면도 갖고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디지 길레스피"의 활동이다. 그는 트럼 페터로서의 역량도 대단하지만 점프로 대표되는 예능 감각(엔터테인먼트)도 그대로 비 밥에 주입시켜 왔다. 그가 남긴 녹음에는 정말로 점프라고하는 것도 있지만 "우-슈비 다바 다바"처럼 마치 악기의 성대 묘사를 하는 보컬리즈라는 기예도 개발했다. 또 다시 쿠바출긴의 타악기 주자 "챠노포죠" 등과 함께 아프로-쿠반 재즈라는 쿠바 음악과 재즈의 만남도 시도했던 것이다.

 

당시는 카브리 연안 국가들의 이민도 증가하고 있었으며 그런 상황을 반영했음과 동시에 재즈 탄생시기에 카브리 음악과의 혼혈성도 재차 상기시켰던 것이다. 물론 찰리 파커도 아프로-쿠반 재즈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멋진 흑인 엔터테이너라고 할 수 있는 쟈이브 뮤직의 슬림 게이라드(vo. g, p)와도 녹음을 남기고 있다. 음악적으로 고도로 발전해도 다양한 대중 예술과의 접합은 정확하고 깔끔한 바를 갖고 있다는 점이 비 밥의 재미를 한층 더 높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1917년 3월 앨러배머주 몽고메리에서 태어난 "냇 '킹' 콜"은 피아니스트겸 보컬리스트로서 30년대 후반 프로 활돌을 개시했다. 39년경부터 기타와 베이스를 추가하여 피아노 트리오를 결성하고 활동했는데 이러한 트리오 편성은 각 악기가 대등한 입장에서 연주한다는 특징이 있다. 마침내 이런 피아노 트리오의 기본 이념이 냇 '킹'콜의 트리오에 의해서 처음으로 실행되었던 것이다.

 

40년 12월 6일 오스카 무어(g), 웨슬리 프린스를 참가시킨 이 트리오에 의한 최초의 공식적 레코딩이 데카 레코드에서 실시되었다. 이를 최초로 해서 41년 10월 22일까지의 네차례 세션을 수록한 <인 더 비기닝>이었으며 더구나 그가 '킹'콜의 이름에 어울리는 지명도를 얻은 것은 43년 11월 30일에 캐피털 레코드에 들어가 제1탄으로 취입한 <스트레이튼 업 앤드 플라이 라이트>가 히트하는 것으로 계기가 되었다.


부연한다면 모던 재즈는 뉴욕의 52번가와 할렘과 많은 젊은 뮤지컬들을 처음으로 재즈로 전향하게 만든 남쪽 할렘의 민튼 극장의 산물이었다. 재즈음악이 1940년과 41년에 민튼 극장에서 연주했던 케니 클락의 캄보 밴드에서 시작되었는지, 또는 같은 시기 뉴욕 일대에서 캡 캘러웨이와 같이 연주하고 있었던 디지 길레스피의 첫 연주 시기의 산물인지, 40년을 넘어서면서 제이 맥설의 캔사스 시티 밴드의 찰리 파커의 연주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조금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 문제는 40년대 초기에 재즈의 새로운 개념이 움트고 있었다는 사실과 아주 평범한 곡일지라도 상당히 멋을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연주가들은 듣고 사색하며 비난하기도 하며 칭찬도 아끼지 않았지만 후에 그들 자신은 다른 사람과 똑같이 모방한 사례는 없었다. 성미가 급한 트럼펫 연주자들은 오래된 사람이나 갓 시작한 사람이나 막론하고 새로운 사조의 음악으로 경도 되었으나 독특한 금관 악기의 테이스트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대게 레스터 영과 찰리 파커의 색소폰 연주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트럼펫 연주자 가운데 참신하고 창조적인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하워드 맥기"이다. 그는 음역이 좁고 장식음이 없는 진솔한 매력을 지닌 고혹적 중성의 멜로딕 배리에이션을 성취시킨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살얼음 위를 걸어가는 것 같은 아주 조심성있는 몸짓과 소리를 냈는데 40년대 말에 찰리 파커의 가장 훌륭했던 연주와 똑같은 수준의 연주를 했으며 관악기 중에서 튜바와 프렌치혼과 바리톤 색소폰을 영입하여 가장 풍부한 창조력을 가진 악단의 리더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즈 트럼펫 연주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단명한 "팻츠 나바로"였다. 거대한 톤 칼라와 훌륭한 청각을 타고난 그는 습성화된 연주 속에서 훈련되었으나 말년에는 그렇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의 순수한 음악적 표현은 찰리 파커를 제외한 어떤 재즈 뮤지션도 따를 수 없었으며 그의 정확성은 오직 클리포드 브라운과 비교될 수 있었다. 클리포드 브라운도 팻츠가 죽은 후 5년뒤 자동차 사고로 타계하고 말았다. 그러면 이제부터 모던 재즈의 초기에 시작된 비밥의 태동과 주변 상황, 뮤지션들의 캐릭터를 알아보고 역사적인 배경과 이들이 미친 모든 모던 재즈의 유파를 전개하기로 한다.


호텔의 일부를 개조하여 1938년 오픈한 레스토랑겸 플클럽인 민튼즈 플레이 하우스에 밤이면 밤마다 다양한 재즈 뮤지션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할렘 118번가라는 장소도 물론이거니와 또 오너인 "헨리 민턴"이 전직 색소폰 주자로 음악가협회 회원이기도 했고 클럽의 매니저가 40년부터 테디 힐이 되었다는 것도 뮤지선들과 크게 교분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들은 재즈 뮤지션들에게 연주의 장을 제공하고 근처의 호텔이나 클럽에서 댄스 뮤직을 연주했던 뮤지션들은 자기들이 연주하고 싶은 연주와 음악을 할 수 있는 장소로 재즈적 연구를 위한 장을 "민턴즈"에서 얻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사이에 "민턴?quot;는 잼 세션의 최적 장소가 되었고 특히 테디 힐이 40년 하우스 밴드를 조직하고부터는 새로운 재즈, 탈 스윙 재즈 지향의 뮤지션들의 거점으로 착보하게 되었다.

 

하우스 밴드는 테디 힐의 원래 멤버와 케니 클락(ds), 죠가이(tp), 닉 펜턴(b), 셀로니어스 몽크(p)라는 변면으로 이루어졌고 여기에 애프터아워의 뮤지션들이 합세하여 잼 세션을 이루었다. 41년이 되어 테디 힐은 "만데이 셀레브 리티 나이트"를 만들고 이미 대스타가 된 콜맨 호킨스, 레스터 영, 벤 웹스터 등도 잼 세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일고 있는 새로운 개념을 흡수하게 되었지만 새로운 컨셉션을 가장 뛰어나게 행한 뮤지션들이 찰리 크리스찬이고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인 것이었다.

 

40년대 초기의 "민턴즈 플레이 하우스"는 스윙 재즈로부터 모던 재즈 혁명의 전야를 방불케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때의 귀중한 녹음이 그 유명한 "민턴즈 하우스의 찰리 크리스찬"이다.


여기서 잠시 짧은 22년의 생을 살다간 찰리 크리스찬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본다. 한마디로 재즈뿐이 아니라 전 파퓰러 음악에 처음으로 증폭기(Amplifier)를 사용한 기타를 위해 몸바친 이로 그는 전기 기타가 아닌 앰플리파이드 기타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따뜻하고 윤기 있는 음악을 만들었다.

 

지금이야 PA시스템이 잘되어 있지만 40년 전후에는 앰프를 통하지 않은 기타의 음량으로는 솔로 연주가 헛수고이며 물리적으로 다른 악기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당시에는 누군가가 말했듯이 "올바르지 못한 방법"이라는 앰프를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크리스찬은 "이노베이터" 였다. 그가 다양한 면에서의 세련된 기타는 "민턴 하우스"에서의 라이브 연주 외에도 베니 굿랜의 캄보 밴드에도 연주가 남아있다.

 

기타의 찰리 크리스찬과 트럼펫의 디지 길레스피 등이 당시의 연주를 기록한 라이브 앨범에서 비 밥 탄생의 뜨거운 호흡과 열정을 느낄 수 있고 모던 재즈 도래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럼 내달에 다시 이들을 만나볼 수 있다

재즈 평론가, 칼럼리스트 / 최 영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