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기/즐~ 재즈

[재즈입문] 스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 Ⅱ

이 상용 2009. 5. 6. 18:24

 


 

재즈입문 Ⅱ

스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재즈 평론가, 칼럼리스트 / 최 영 수


재즈는 이제 미국에 국한된 음악이 아닌 범세계적인 음악 언어이며, 국가와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함께 즐기고 공부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재즈 음악의 초심자들에게 그 방법을 조금은 어눌하지만 조금씩 접근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려 한다.


스윙 시대의 개막

1929년 가을에 시작된 뉴욕 증권 시장의 주식 폭락은 전 세계적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켜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뉴 올린즈 스타일이나 딕시랜드 재즈가 줄을 이루었고 이러한 불황을 배경으로 재즈 애호가들은 시끄러운 음악에서 조용하고 달콤하며 스윙감이 강한 댄스 음악을 찾기 시작했다. 이 무렵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 등은 유럽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는데 후일 재즈사가들은 도피 행각으로 기술하고 있다.

29년부터 35년까지 6년간은 거의 재즈를 들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대공황 기간 중 호구지책에 바쁜 이들이 과연 연주를 하여 돈을 벌 수가 있었나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결국 이런 정황에서 등장한 스위티한 댄스 음악이 스윙재즈라는 장르의 막을 올렸다. 이렇게 등장한 스윙 재즈는 앙상블을 중심으로 하는 대편성 악단으로 연주 되었고, 이때까지 재즈가 흑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에 반해 커머셜 밴드 출신의 백인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재즈사에 있어서 아주 별나고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사건이다. 스윙 재즈의 붐은 30년대 후반에 서서히 오기 시작했다.

불경기는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고 실직과 생활고를 타파하고 일어난 서민들에게 그들의 기분을 부추길 수 있는 리듬감 강하고 발랄한 음악이 여기 저기 들려왔다. 그것이 바로 베니 굿맨을 필두로 글렌 밀러, 노비 도오시, 아티 쇼 등 백인들이었다. 이들 백인 밴드 리더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전국 각지의 그랜드 볼룸이나 호텔에서 커다란 호평을 불러 일으키고 이런 스윙 재즈의 붐과 함께 인기를 얻었던 것이 각 악단에 소속 되었던 싱어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토미 도오시 악단에서 노래하던 젊은 날의 후랭크 시나트라가 유명했으며 이는 스윙 재즈가 황금시대를 구가하는데 일조를 했다 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스윙의 왕' 베니 굿맨

스윙 재즈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 원동력이 된 것은 베니 굿맨 오케스트라였다. 베니는 흑인 오케스트라의 선구자인 플렛쳐 핸더슨 악단의 편곡들을 매입하여 이것을 밝고 세련되게 리메이크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특히 베니 굿맨은 1936년 피아노의 테디 윌슨과 비이브라폰의 라이오넬 햄턴을 영입하여 오케스트라와는 별개로 캄보 밴드로도 연주 하였는데, 이러한 베니 굿맨의 캄보 밴드는 흑,백인이 혼합하여 청중들 앞에서 공연한 최초의 일이라 할 수 있다.
굿맨에 이어 아티 쇼, 토미 도오시 등 백인 밴드의 훌륭한 면도 간과 할 수 없으나 스윙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오케스트를 말할 때, 흑인인 듀크 엘링턴 악단과 카운트 베이시 악단을 배제 할 수는 없다. 또한 이 때의 오케스트라에 소속 되었던 인기 연주자로서 실력을 겸비한 솔리스트가 등장하고 솔로 예술가로서의 재즈를 더욱 더 풍요롭게 하였던 바 테너 색소폰의 콜맨 호킨스, 벤 웹스 터, 레스터 영 등 기라성 같은 테너 명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재즈의 암흑기에 처음으로 재즈의 대중화에 앞장 섰던 '스윙의 왕' 베니 굿 맨을 알아 보고자 한다. 1909년 5월 30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유태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16세때 이미 맴 폴랙에게 재능을 보여 26년부터 29년까지 그의 악단에서 연주하였고, 34년에는 자기 밴드를 조직하여 연주하였으며 35년에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고 오케스트라와는 별도로 피아노의 테디 월슨, 드럼의 진 크루퍼를 참가시킨 트리오를 조직하여 연주하는 등 스윙 시대의 왕좌에 군림하게 되었으며 B.G 라는 이니셜로 통한 스윙 재즈의 창시자이고,'KING OF SWING' 이라 칭한 백인 재즈의 기린아였다. 특히, 댄스의 반주 음악이었던 재즈를 감상용 음악으로 전환시킴과 동시에 남녀노소의 계층이 없는 팬을 확보하여 재즈를 대중 음악으로 정착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1938년 1월 16일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개최된 재즈계 최초의 콘서트는 상징적이고 재즈의 미래를 제시한 빅 이벤트였다. 특히 콘서트에 참가한 테디 월슨(piano), 라이오넬 햄턴(vibraphone), 찰리 크리스찬(guitar) 등은 흑인들로서 기량이 출중하여 콘서트를 더욱 빛나게 된 바 이는 B.G의 용기와 그들의 실력이 어우러져 이루어 낸 진정한 미국 음악으로서의 지평을 연 쾌거였다. 시카고의 빈민 가정에서 자라면서 유태계 특유의 음악적인 감각을 가다듬어 클라리넷 연주자로서의 완벽한 기량을 발휘한 B.G는 항시 멜로디 라인을 중시했으며 밝고 쉽게 친근감이 가는 프레이징과 리프(riff)에 특징이 있었다. 더구나 연주 실력이 너무 우수하여 클래식의 거목들인 요제프 시게티 (violin), 베라 바르톡(Piano)과의 협연을 하는 등 장르를 초월했던 클라리넷의 거인이었다.


듀크 엘링턴의 등장

한편, B.G를 정점으로 미국을 뒤흔들었던 스윙 뮤직 붐은 재즈가 모처럼 음지에서 벗어나 밝고 따뜻한 곳으로 나온 점이 획기적인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팬들은 스윙 뮤직이 1920년대 금주령 속의 비밀 주점이나 별로 좋지 않은 장소에서 흑인들이 연주한 재즈라는 저속하고 천박한 음악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재즈는 흑인들의 소란한 음악이지만 스윙은 백인이 창조한 펀전하고 발랄한 새로운 음악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일례로 지미 도오시, 아티 쇼, 밥 크로스비 악단등은 백인 밴드였고, 듀크 엘링턴이나 지미 런스포드 악단은 흑인 취향이 있는 음악이라 스윙과는 별개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 듀크 엘링턴 악단의 매니저로 있던 어빙 밀즈가 엘링턴 악단이 붐을 타지 못하는데 개탄하여 「l932년 불황의 늪에서 '스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라는 곡을 만든 위대한 선각자 듀크 델링턴」이라고 선전하였으나 결국 인기를 얻지 못하여 이듬해 엘링턴은 유럽으로 연주여행을 떠나고 말았다. 엘링턴의 음악이 유럽은 물론 세계적으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으나 실제로 인기를 얻기는 1956년 7월 뉴 포트 재즈 페스티발 출연하고 그 때 녹음된 라이브판이 발매된 이후 부터이다.

그러면 여기서 재즈의 대부 듀크 엘링턴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1899년 4월 29일 워싱턴 D.C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케네디 '듀크' 엘링턴은 소년 시절에 얻은 별명이 'DUKE'여서 통상 듀크 엘링턴이라 한다. 듀크는 1920년대에 밴드를 결성한 이후 1974년 5월 24일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실로 반세기에 걸친 현역으로서 오케스트라 리더, 피아니스트로 활약하고 그가 연주한 레파토리의 대부분을 스스로 작곡하여 편곡을 하고 엘링턴만의 독특한 쟝글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 내었으며 스스로 재즈의 역사를 꾸며온 재즈 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다. 더구나 본업인 재즈뿐만 아니라 특히 작곡가로서의 엘링턴은 죠지 거쉰과 더불어 20 세기 미국이 배출해 낸 유니크한 작풍과 재능을 가진 작곡가로서 더욱 유명하다.



10대에는 상업 미술가를 지망했지만 럭키 로버츠의 랙 타임 피아노에 흠뻑 빠져 음악의 길을 걷기로 하고, 1922년 드러머의 권유로 뉴욕에 진출했다. 마음먹은대로 일자리를 얻지 못하여 일단 고향으로 돌아와 밴죠 주자 엘마 스노우던의 밴드에 입단해서 1924년 스노우던이 손을 뗀 밴드를 인수하여 엘링턴 밴드라고 이름 붙여 처음 리더로서 일을 시작하고 그 해 가을 6인 편성으로 '워싱토니안즈' 란 악단명으로 처음 레코드 취입을 하였다. 27년 할렘의 '카튼 클럽'의 전속 악단으로 일하며 <The Mooche>, <Misty Mornin'>, <Cotton Club Stomp>, <Mood Indigo>, <Rockin'In Rhythm> 등의 걸작품을 작곡하여 댄스 뮤직이란 고정 관념을 깨고 엘링턴 뮤직을 확립했다. 피아니스트인 엘링턴은 "나의 악기는 나의 오케스트라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는 멤버 개개인의 재능, 매력, 악기 등을 고려해서 작곡했고, 그 자신의 독특한 사운즈를 창출했다.

32년에는 전술한 '스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라는 곡을 작곡해서 30년대 중기의 스윙 붐을 예언했지만 미루어 보면 흑인 재즈의 음악적 정서를 체득하고 백인 취향으로 통속화한 베니 굿 맨등의 백인 밴드가 붐을 타던 스윙 시대에도 엘링턴은 보다 고급스러운 엘링턴 뮤직으로 일관하고 감상용 재즈를 발표해 왔으며 40년 무렵에는 최강의 멤버와 완숙한 작곡에 의해 재즈계 정상에 올랐다. 43년에는 오랜 숙원이었던 카네기 홀에서의 콘서트를 감행했으며 50년 이후에는 전세계 순회 연주를 하는 등 반세기 동안 활동하며 댄스 넘버 재즈 오리지널, 가곡등 작곡수가 2천 내지 3천곡에 이르는 위대한 작곡가였다. 엘링턴은 그의 작품과 연주를 통해 흑인 민족의 역사, 전통, 문화를 말하고 동시에 편견과 증오를 초월한 인간의 대자유를 보여준 신사였다.


카운트 악단의 탄생


한편, 30년대 후반의 스윙의 황금 시대에 가장 익사이팅한 밴드로서 활약한 췬 웹 악단은 최전성기를 맞은 35년 17세 흑인 소녀를 전속 가수로 세웠다. 그 전년도에 췬 웹이 할렘에 있는 아폴로 극장에서 실시된 아마츄어 콘테스트에서 천부의 재즈 가수라고 지목해 두었던 그가 바로 버지니아 출신의 엘라 핏제랄드였다. 췬 웹의 집에 같이 살면서 밴드의 인기와 그녀의 인기가 동반 상승하여 절정기를 구가하였다. 38년 엘라의 큐트한 목소리로 <A Tisket, A Tasket>이 공전의 힛트를 쳐 엘라의 인기는 결정적이 되었다.

캔사스 시티 제일의 밴드였던 베니 굿맨 모턴 악단은 35년 4월 모턴의 사망으로 해산될 위기를 맞았는데 29년부터 이 악단의 피아노를 담당했던 월리암 빌 베이시가 멤버를 12편성으로 재정비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악단은 36년 봄 캔사스 시티에 있는 '리노 클럽'에 레귤러 멤버로 출연하여 방송으로 중계되었다. 이 때 아나운서가 베이시를 'Count(백작)'라는 경칭을 사용하여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카운트 베이시로 불리게 되었고, 위대한 카운트 악단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베이시 악단의 연주를 라디오로 듣고 감탄한 사람들 중에서 존 하몬드, 베니 굿맨 등이 나타나 강력하게 동조하고 협력하여 처음으로 순회 연주를 단행했고, 시카고의 '그랜드 테라스', 뉴욕의 '로즈랜드 볼룸'으로 진출하였다. 뉴욕에 입성한 것이 36년 12월이고 37년 3월 프레디 그린(guitar), 월터 페이지(bass), 조 존스(drums)에 의한 불멸의 ALL AMERICAN RHYTHM SECTION의 완성을 보았던 것이다. 베이시 악단의 밴드 칼라가 완성된 시점이기도 하다. 이 무렵에는 베이시 악단에 포진하고 있던 명 연주자 레스터 영, 벅 클레이천, 해리 '스위트' 에디슨, 딕키 웰즈 등의 면면을 볼 수 있다.


베이시 스윙의 숨은 맛은 통기타의 독특한 보이싱에 있는데, 프레드 그린은 일생동안 앰프를 사용하지 않고 생음으로 연구했다. 기타의 제1현과 재6현은 그다지 사용하지 않고 안쪽의 4줄로 만들어 내는 보이싱은 정말 특이하다. 브라스 섹션의 풀톤의 프레이즈 사이에 드라이한 4비트의 기타 컷팅 사운드가 달콤하고 포근함을 주고 있다. 잠시 카운트 베이시에 대해서 알아 보기로 하자. 베이시는 듀크 엘링턴과 함께 재즈 사상 가장 오랫동안 제1급 아티스트로 빅 밴드를 이끌고 활약해 온 아주 위대한 밴드 리더의 한사람이다. 1904년 8월 21일 뉴 저지주 레드 뱅크에서 태어나 84년 4월 26일 플로리다주 병원에서 십이지장암으로 사망했다.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고, 베이시는 동네 소년 밴드에서 드럼을 치다가 소니 글리어 소년의 드럼 소리에 의기를 상실하고 피아노로 전향, 할로웨이 부인이라는 교사에게 피아노를 사사 받고 할렘으로 가서는 팻츠 월러에게도 배웠다. 1927년 무렵 금주법의 와중에서도 캔사스 시티는 치외 법권적인 환락의 도시였다. 29년 베니 모턴 악단의 세컨드 피아니스트로 입단했고, 35년 모턴이 갑자기 죽어 이를 인수하여 리더가 되었다. 이후는 유명한 프로듀서이자 평론가였던 존 하몬드의 후광으로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36년 뉴욕에 입성해서는 캔사스 시티 시대의 블루스와 오리지널 리프 곡만으로는 뉴욕커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가능한 한 유행가, 영화 주제가, 탱고, 룸 바 등 쟝르를 초월한 연주를 하게 되었고 38년 1월 사보이 볼룸 출연이 대호평을 받고 39년 이후는 웨스트 코스트를 시발점으로 전국 순회 공연을 감행했다.


빌리 흘리데이의 'Strange Fruits'


50년, 일시 해산하고 캄보 밴드를 결성하여 연주하기도 했지만 52년 오케스트라를 재편성하여 연주를 재개한 후 퀀시 존스, 닐 헤프티, 살네스 티코 등을 편곡자로 기용하고 앙상블에 묘미를 더해 실력을 발휘했다. 카운트 베이시의 레코드 취입이 몇매 정도인지 듀크 엘링턴에 비하면 적지만 그 수를 헤아릴 길이 없다. 듀크 엘링턴이나 카운트 베이시의 평전과 역사가 방대하여 여기서 줄이고, 전술한 존 하몬드가 1933년 할렘에 있던 '모네트서퍼 클럽'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지금까지 들었던 어느 누구보다도 기가 막히게 노래한다"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17세의 흑인 천재 가수 '빌리 할리데이'였다. 그녀를 소개한 기사가 멜로디 메카지 33년 4월호 였고, 하몬드는 그녀의 훌륭함을 열정적으로 기사화 했으며 실제로 들어보러 갔던 뮤지션들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함께 레코딩을 하고 싶다고 얘기한 사람이 베니 굿맨이었고, 하몬드는 컬럼비아 레코드사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렇게 해서 1933년 11월 27일 베니 굿맨을 음악 감독 및 리더로 하는 레코딩 밴드를 앞세워 불세출의 재즈 싱어 빌리 할리데이가 첫 녹음을 하게 되었다. 물론 단 한곡 (Your Mother's Son-in-Law)이였지만, 이는 빌리의 출세를 예견한 계기가 되었다.


35년에는 테디 월슨의 레코딩에 참가하고, 36년 7월부터는 자기 이름으로 레코딩을, 37년 3월부터 38년까지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서 연주하고, 그해 11월까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티쇼 악단의 전속 가수로 노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33년에는 데뷰한 이래 그러한 활동을 통해 이미 수많은 명연주를 남기게 되었으나, 그녀의 존재는 그 당시 미국 사회에서 스타로 대접 받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이는 인종 차별에서 온 편견이 주된 원인이었다. 39년 초 밴드 싱어에서 독립하여 솔로 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이렇게 새롭게 출발한 가수로서 새로운 레파토리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카페 소사이어티' 에 출연중 루이스 앨런이란 흑인이 가져와 보여준 가사에 빌리와 소니 화이트가 곡을 만들었던 것이 바로 빌리를 불세출의 가수로 만든 'Strange Fruits'이다. Commodore Record 사에 의해 레코딩 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반 중에 명반이다. 물론 이 레코드 속에는 <Yesterdays>, <Fine and Mellow>, <I Gotta Right to Sing the Blues> 등도 수록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Strange Fruits>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일약 스타 자리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과일이 열렸다···. "라고 시작하는 이 곡은 백인에게 린치를 당한 흑인을 노래하고 있고, 인종 차별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다고 미국 사회의 비판을 받는 등 심각했던 노래이고 빌리 할리데이의 불멸의 위치를 구축한 명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