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기/즐~ 재즈

[재즈입문]-재즈의 탄생, 뉴 올리언즈~

이 상용 2009. 5. 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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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입문]  재즈의 탄생, 뉴 올린즈 재즈

재즈는 이제 미국에 국한된 음악이 아닌 범세계적인 음악 언어이며, 국가와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함께 즐기고 공부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재즈 음악의 초심자들에게 그 방법을 조금은 어눌하지만 조금씩 접근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려 한다.

재즈로의 입문

우선 어느 때 어떤 종류의 음악을 좋아하던 간에 최소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부드럽고 차분하며 남을 이해하고 모든 장르의 음악을 왜곡되고 편견을 가지고 얘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역시 인식을 바꾸는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코 내 마음 같지는 않았다.


재즈에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입문하기 전에 좋아했던 장르나, 아니면 앞으로 듣고 싶은 장르를 생각해 보자. 악기별로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고전 음악 내지는 밥 음악의 장르별로 접근할 것이냐를 선택한 후 치밀한 작전 속에서 상륙을 개시한다. 엄청나다고 생각하는 Jazzland를 향하여서 말이다. 작전의 요체는 성공이다. 성공을 위해서 재즈의 성을 공략할 뿐이다. 일단 한 개의 성을 성공적으로 함락하면 분명한 교두보 확보로 다음성은 쉽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성공적인 공략을 위해서는 상대의 인적, 물적 재원을 잘 알아야 할 것이며, 특히 역사성, 도덕성, 지정학적 조건, 사회적 환경, 시대적 배경 등에 아주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않고서는 백전 백패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재즈는 접할 기회(예로서 TV 프로그램 또는 FM 방송)가 적으므로 인내와 각고, 자기헌신의 노력이 없이 쉽게 넘나들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국내 음반 시장의 사정이 좋아졌으므로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여유 있게 선택할 수 있고 또 충분한 정보도 제공되고 있으므로 이런 점에서 초심자들은 옛날에 비해 무척이나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손쉽게 디스크를 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재즈 매니아 혹은 매니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컬렉션 에피소드는 여러 차례 지상을 통해 알려져 진부한 보리고개 얘기이므로 각설하겠다.
다만 '풍요 속의 궁핍' 이란 말처럼 막상 친구의 권유, 잡지를 통해 오디오 삽의 추천으로 자의든 타의든 몇 장의 재즈 디스크를 구입해서 들어보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재즈가 과연 무엇인지, 진정 어떤 장르의 재즈를 들어야 하는지에 속 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으며 또한 명쾌하고 분명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경험과 시행 착오상 이렇게 접근해 보니 그래도 무턱대고 듣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적이고 혼돈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이제부터 한걸음씩 나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보다 쉬운 접근을 위해서 재즈 탄생의 배경과 역사적 의미, 아티스트, 도덕성, 재즈의 언어, 악기와 편성, 스타일, 명곡, 명반, 용어 내지는 테크닉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하고 포괄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오른쪽 사진은 빅스 바이더백)


뉴 올린즈 크리올

재즈는 금세기 초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 올린즈에 있는 홍등가 스토리빌에서 태어났다. 원래 흑인 노동자와 노예들 사이에서 불려지던 Work Song(노동요)과 Spirituals(흑인 영가), Gospel(복음성가), 장송곡 등과 서양음악이 혼입 융화되어 뉴 올린즈 전통 브라스 밴드와 용융되어 탄생되었는데 여기에는 뉴 올린즈에 거주하던 Creole(크리올)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뉴 올린즈는 미국의 영토가 되기 전에는 프랑스의 땅이었으며 프랑스 당국자들 은 백인 주인과 흑인 노예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크리올이라 부르며 흑인신분에서 해방시켰다. 이들은 다른 흑인 노예들과 다르게 흑인 특유의 음악과 필링을 갖고 있으며 또한 유럽적인 체계적이고 고급스런 음악교육도 받았다. 뉴 올리언즈의 크리올들은 흑인음악의 특성을 유럽적인 전음계 기악 형식으로 표현하는 초기 재즈 탄생에 재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한편, 1910년대부터 1920년대에는 남부로부터 북부의 공업도시(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로 취업을 하기 위해 다수의 인구가 이주하였는데 이 때 유능한 재즈 팬들도 시카고로 이주하여 연주생활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때를 비유하여 재즈 사에서는 '재즈 엑소더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초기에는 재즈의 왕인 루이 '새치모' 암스트롱을 중심으로 브라스 밴드에서 탈피하여 솔로 연주를 도입하는 새로운 재즈가 확립되었다. 이를 뉴 올린즈 재즈 혹은 딕시랜드 재즈 스타일이라고 분류하는데 재즈 사상 최초의 레코딩은 1917년에 녹음된 ODJB(Original Dixieland Jazz Band)이였다. 이러한 백인 그룹의 역사적 녹음을 시작으로 시드니 베세와 쟈니 도즈 형제의 레코드와 루이 암스트롱의 선배인 킹 올리버의 명연이 녹음되었다(킹 올리버와 루이 암스트롱 사이의 관계는 차기에 소상히 설명하기로 한다). 전설적인 뉴 올린즈 스타일의 명연주자 벙크 죤슨의 연주도 이런 환경에서 녹음되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의 녹음은 남아 있지 않지만 어찌 되었던 재즈는 탄생되었지만 그 실태나 구체적인 자료는 전무한 형편이다. 그러나 40년대에 이르러서 전술한 트럼펫의 명인 벙크 죤슨을 찾아내어 당시 재즈 스타일을 재현시켜 보았더니 따뜻하고 소박한 연주를 통하여 그 당시의 스타일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기라성 같은 백인 트럼펫티스트 제리 롤 모턴, 흑인 토마스 '팻츠 월러, 스카트 죠플린, 제임스 프라이스 죤슨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뮤지션이 명멸해 갔다. 특히 이 때의 피아노 연주 스타일을 스트라이드 내지는 래그타임이라 하여 한 시절을 풍미하기도 했다. 킹 올리버 악단의 활약으로 재즈는 미국 각지에 넓게 확산되어 나갔으며 그 중에서도 희대의 엔터테이너 루이 암스트롱은 20년대를 통하여 뉴 올린즈에서 시카고와 뉴욕으로 진출하여 대 활약했으며 그 지역에 재즈의 뿌리를 내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20년대 말과 30년대 초까지 이끌어 왔던 밴드 '핫파이브'와 '핫세븐'은 뉴 올린즈 재즈 초기의 최대 성과로서 오늘날에도 크게 호평을 받고 있다. 결국 루이를 추앙하는 재즈 아티스트들에게 원형이 되었고 현재 전세계적인 인기를 독점하고 있는 재즈와 고전 음악의 기린아 윈튼 마살 리스도 루이 암스트롱에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뉴 올린즈 재즈의 스타일을 살펴보면, 세컨드 라인으로 베이스 라인과 리듬이 특징이며 거기에 브라스 밴드의 앙상블이 가미되어 한층 더 감흥을 일으키고 있다. 이 때 사용된 악기들은 트럼펫 또는 코오넷, 클라리넷, 트럼본, 튜바, 드럼, 벤죠, 더블 베이스, 피아노 등이며 중량이나 크기 문제로 거리나 퍼레이드에서 연주할 때는 피아노가 빠지는 게 상식화되었다.

한편 루이 암스트롱 밴드와 더불어 20년대를 대표하는 악단은 제리 롤 모턴의 '레드 핫 페퍼즈 (Red Hot Peppers)' 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루이 암스트롱 밴드가 솔로를 중시하여 재즈에 솔로 개념을 도입했다면 제리 롤 모턴 그룹은 뉴 올린즈 재즈의 집단 즉흥연주를 발전시켜 긴밀한 그룹 표현의 전형을 제시하였다. 완성도가 높아 초기 재즈의 유일무이한 밴드의 앙상블을 보였으며 셉텟(칠중주단)으로도 오케스트라처럼 풍부하고 농밀한 사운드를 창출했고 개개인의 솔로 또한 대단하여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 한가지 부연해서 설명한다면 재즈에서 오케스트라라 하면 10인조 밴드까지를 일단의 캄보 밴드라 하고, 10인 이상으로 편성된 밴드를 오케스트라라고 한다. 흔히 알고있는 고전 음악에서 심포닉 오케 스트라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카운티 베이시 앤드 히스 오케스트라' , '듀크 엘링톤 오케스트라' 등이다. 솔로(1인), 듀오(2인), 트리오(3인), 콸텟(4인), 퀘텟(5인), 섹스텟(6인), 셉텟(7인), 옥텟(8인), 노넷(9인), 텐텟(10인) , 오케스트라(11인 편성부터)라고 함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루이 '새치모' 암스트롱

그러면 루이 암스트롱을 조금 더 설명하기로 한다. 뉴 올린즈의 불량 소년으로 소년감호소에서 6개월간 코오넷을 배운 새치모는 킹 올리버를 스승이자 선배로 모셔 실력을 연마하게 되고 1922년 한발 앞서 시카고로 갔던 올리버의 초청으로 그 밴드의 제2코오넷을 담당하며 시카고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 새치모는 올리버의 단순한 주법을 답습했지만 스타카토를 이용하는 힘있는 연주와 함께 한번만 들어도 확연히 알 수 있는 개성을 전개했다. 이는 백인 트럼펫티스트 먹시 스패니어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던 바가 크지만 스패니어 역시 루이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런 현상을 재영향이라고 하며 재즈계에는 무수히 많은 재영향 뮤지션이 있다.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명하기로 하고, 새치모는 또한 재즈 보칼 중 스캣송을 처음 부른 사람으로 이 스캣송이 재즈사에 끼친 영향은 보컬에 국한되지 않 고 기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제 동시대를 풍미한 한 사람인 백인 트럼펫리스트의 전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빅스 바이더 백', 혜성같이 나타나 요절한 코오넷, 피아노 연주자로서 코오넷은 대개 독학으로 배웠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아마 16세 무렵 에메트 하디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4년 '월베린즈' 를 결성하여 시카고에서 연주하여 명성이 더 높아졌고 '진 골드캣 악단, 1927년에 '폴 화이트맨' 악단에서 일하였으나 풀 밴드에서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심은 대개 앙상블을 겸한 짧은 솔로(즉흥연주)에서 그의 음악적 기량을 충분히 엿볼 수 있으며 그가 1927년에 작곡한 피아노곡 'In a Mist' 에서는 모리스 라벨의 악풍으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유럽풍 음악의 편린을 느끼게 한 수작이다. 그러나 그는 28세로 요절하였다.


또다시 초기 재즈의 흐름을 간파하고 다음에 닥쳐올 스윙 시대를 예고한 명피아니스트 겸 편곡자로 또 밴드 리더로서 일세를 풍미한 그러나 결코 순탄한 생은 아니지만 후세의 스윙 재즈의 정형을 제시한 '플렛쳐 헨드슨'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1923년에 자기의 밴드를 결성하고 그 다음해 동 밴드에 루이 암스트롱을 영입하였다. 이 무렵 암스트롱은 24세의 나이로 그의 음악적 컨셉트가 확립된 것은 바로 이들의 조우로 인해서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핸더슨은 피아노나 블루스 가수의 반주를 훌륭하게 해냈지만, 오히려 밴드의 리더나 편곡자로서 재즈계에 미친 공적이 더 높다. 1930년대 그의 밴드출신으로 배출된 수많은 연주자들이 재즈계에서 활약했고 편곡면에서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으로 1935년 베니 굿 맨 악단이 사용했던 핸더슨의 편곡은 그 후 베니 굿맨이 스윙의 왕좌에 군림하는데 기초가 되었고 또한 스윙 스타일의 지평을 열어주게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 츄 베리, 베니 카터, 콜맨 호킨스, 팻츠 월러 등이 이 악단에서 재능을 연마하고 기반을 다져서 각자 명인의 기예를 재즈 팬들에게 보여 주었지만 정작 명물 재즈 밴드의 리더인 본인은 54세의 나이로 크리스마스 종소리를 들으며 중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불운했던 생을 마감하였다.

스토리빌에서 뉴욕까지

재즈의 탄생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뉴 올린즈의 스토리빌에서 시카고 뉴욕 재즈 시대까지의 역사적 환경과 의미를 간추려 보기로 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되었지만 미국은 해군기지였던 뉴 올린즈의 홍등가가 해군 당국의 명령으로 폐점되어 그곳을 생활의 근거지로 삼았던 흑인과 크리올 출신 재즈 팬들은 활동의 장소를 잃게 되었다. 거기에 남아서 유곽 주변의 카페나 유람선에서 연주를 해 온 몇몇 소수의 재즈 팬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아티스트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서 미시시피 강을 따라 센트 루이스, 멤피스를 시발로 뉴욕, 시카고, 캔자스시티(미주리주) 등으로 분산 이주하였다.


이 대이동이 바로 미국 전역에 재즈를 보급시키는 동기가 되었고 그 중 많이 모였던 시카고가 1920년대 재즈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재즈 중흥의 전초 기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시카고를 중심으로 재즈를 지망하는 백인 젊은이들이 루이 암스트롱 외에도 뉴 올린즈에서 온 재즈맨들로부터 심한 충동과 자극을 받으며 그들 나름대로 컨셉트를 충만시켜 스타일을 만들었는데 이를 '시카고재즈' 혹은 '시카고스타일'이라고 했다. 한편 1920년대 뉴욕 할렘에서는 제임스 P 죤스, 팻츠 월러, 얼 파타 하인즈 등 훌륭한 스트라이드 피아노 연주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플렛쳐 핸더슨과 듀크 엘링턴이 악단의 편성을 확대하고 편곡을 더욱 중시하여 소규모 밴드에서 빅 밴드 재즈의 길을 개척하였다. 당시 빅 밴드는 이미 댄스를 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통념으로 되어 있었지만 헨더슨이나 엘링턴은 그들 연주 속에 재즈의 영감이랄까 생명력을 불어넣고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등 재즈의 매력을 팬들에게 제공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댄스 레코드로서 발매된 암스트롱이나 엘링턴의 연주가 유럽에서는 발 빠르게 미국의 새로운 음악의 하나로 잘 포장되어 감상용 음악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다시 재즈 탄생 당시의 정황을 알아보기로 하자. 뉴 올린즈는 불란서 조차지였기 때문에 늘 음악이 충만한 도시였다. 재즈맨은 흑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요 여망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재즈맨이 되고 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몰락한 빈민가(Up Town)에서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여 악보를 읽을 수조차 없었고, 아무런 악기(해군기지에서 못쓰는 고물악기)나 힘껏 불어대고 있지만 이는 음악이라기보다 차라리 소음에 가까운 발악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그러나 크리올들은 부모의 덕분에 유럽 음악의 이론이나 연주 방법 등 음악적 소양을 충분히 쌓았고 악보도 당연히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이들의 음악은 조심스럽게 발전해 왔다. 이는 분명 백인의 영향이 아닌 크리올의 역할이 지대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럽 음악과 흑인이 만날 수 있었던가? 이는 분명 크리올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며 재즈 탄생의 절대절명의 순간을 결정하게 된 위대한 요소였다. 노예들의 해방에 따라 지위가 격상된 흑인과,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닌 크리올의 지위가 허락되어 이들의 어쩔 수 없는 만남에서 어우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되었다. 흑인과 반 흑인의 조우에서 잉태된 혼합 음악, 환언하면 흑인의 영감과 크리올의 유럽 음악이 융합되어 재즈라는 엄청난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 탄생되었다. 현재 크리올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그 뿌리를 확인조차 할 수 없다. 재즈는 미합중국의 음악이며 세기적 산물이며 신세대 문명의 혼합물이다. 따라서 순수 예술로서의 당위성을 인식한 가운데 재즈로 접근함이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뉴 올린즈 재즈는 여기에서 줄이고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베니 굿맨 등으로 이어지는 스윙 시대로 진입하기 위해 씽,씽 ,씽.

재즈 평론가, 칼럼리스트 / 최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