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기/즐~ 재즈

[재즈입문] 스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III

이 상용 2009. 5. 6. 18:26




불세출의 가수 빌리 할리데이가 데뷔 하고 여자 재즈 싱어의 최정상 엘라 핏 제럴드가 데뷔하는 등 보컬계에도 새로운 판도가 형성되었다. 잠시 남성가수를 알아보자 물론 스윙 재즈 붐의 주된 요인은 가수들의 숨은 인기가 일조를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지위를 구축한 폴 화이트맨 악단은 30년에 제작된 영화 '킹 오브 재즈'에 밴드 모두 출연하였고 순수한 재즈 밴드는 아니었지만 재즈를 좋아했던 폴 화이트맨 스스로는 '재즈의 왕'이라고 자칭하고 그 인기 때문에 만들어진 영화였다.


이 영화를 만든 후 본 악단의 전속 코러스 그룹으로 27년부터 활동해 온 남성 트리오 '리듬 보이즈'가 물러나고 그들 스스로 독자적인 그룹의 자격으로 듀크 엘링턴 악단과 공연하였지만 그 후 해산하고 말았다. 그 코러스 중에서 솔로 가수로 새롭게 데뷔한 것이 금세기 최고의 가수 빙 크로스비였다.


크로스 비는 31년 CBS방송에서 솔로 가수로서 첫 출발 을 했으며 신인 가수로서 매력적인 바리톤 보이스에 도취된 팬들의 문의 전화가 빗발치는 등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CBS방송은 이를 계기로 '빙 크로스비 쇼' 라는 타이틀로 방송하여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의 신기록을 깬 대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의 나이 꼭 30세 때의 일이었다. 35년부터 40년,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될 무렵까지가 재즈의 일반적인 인기를 얻은 피크 타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시기의 스윙 붐은 빅 밴드 사운드 붐의 기폭제가 되었고 빅 밴드에서의 보컬리스트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다.
재즈와 같이 기악적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도 발생 당시는 보컬이 주를 이루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지금도 성대하게 연주되고 있는 심포니 뮤직은 보컬 리스트가 나올 때까지의 서곡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이는 음악가들의 이론이 아니고 청취자들의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20년대 초 이 밀리언 셀러가 된 후 전 미국 제일의 스위트 밴드의 사실 스윙 붐을 만든 것은 듀크 엘링턴 악단이나 카운트 베이시 악단 같은 소위 재즈 빅 밴드가 아니고 파퓰러한 백인 빅 밴드였다. 베니 굿맨, 글렌 밀러, 토미 도오시, 아티 쇼 밴드에 인기가 집중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중에서 토미도 오시 악단에는 그 당시 유명한 청년 프랭크 시나트라가 전속 싱어로 활동 했는데 Paul Whiteman in Berlin백인 빅 밴드가 갖고 있는 특유의 음악성, 다시 말해 이해하기 쉽고 춤추기도 좋고 동시에 설득력도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이 이 시기에는 잘 적응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재즈는 남성적인 음악이고 거기에 덤으로 감상용 음악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여성 팬을 배제한 얘기는 결코 아니다.


여기에서 잠깐 '마이웨이'를 불러 흔히 팝송 가수로 알기 쉬운 프랭크 시나트라를 알아보고자 한다. Francis Albert(Frank) Sinatra는 1915년 l2월 12일 이탈리아계 이민의 외아들로 뉴 저지주 홉펜에서 태어났다. 17세때 빙 크로스비의 무대 공연을 보고 가수를 지망하여 39년 해리 제임스 악단과 40년부터 42년까지 토미 도오시 악단을 거쳐 솔로 싱어로 독립했다.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수많은 히트 앨범을 내놓아 그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40년대 후반부터는 약간 저조했으나 53년에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는 기적 같은 컴백과 동시에 가수로서도 새로운 경지를 열고 캐피털 레코드사로부터 속속 명반을 만들어냈다. 61년에는 리프라이즈라는 레코드사를 스스로 설립하여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레코딩 작업을 시작했고 71년부터 73년까지 잠시 일선에서 은퇴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늘 미국 쇼 비지니스계의 제왕으로 군림해왔다. 시나트라의 첫 레코딩이 1939년 7월 13일 해리 제임스 악단의 전속 싱어로서 녹음한 'From The Bottom of My Heart'와 'Melancholy Mood' 2곡이었다. 첫 레코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1000곡이 훨씬 넘는 레코딩을 하였지만 일관된 자신의 아이텐티티를 갖고 시대의 조류에 따라 변화해 왔다. 일반적으로 캐피털 시대(53-62)를 전성기라고 하는 것이 재즈 비평가들의 중론이다. 스스로의 삶을 통하여 체득한 노래의 멋스러움과 깊이를 더한 감미롭고 센티멘탈하며 섹시한 매력이 그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립하게 되었다. 가수이자 영화 배우인 엔터테이너로 예계를 대표하고 80세를 넘어서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스타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무대에 오르고 있는 프랭크 시나트라. 그는 분명 미국 연히려 리더인 토미 도오시 이상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재즈사를 통하여 지대한 공헌을 했던 레코드 회사의 면면을 알아보기로 하자. 1917년 재즈로서는 첫 녹음을 한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ODJB)의 '리버티 스테이블 블루스', '딕시랜드 재즈 밴드 원 스텝'이 RCA VICTOR에서 17년 2월 26일에 녹음하여 3월 7일에 발매하였다. ODJB는 이에 앞서 1월 24일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녹음했다고 하는 설은 있지만 알 길은 없다. 백인 밴드의 첫 레코딩 이후 4년만에 ODJB를 이끌어 주던 뉴 올린즈 재즈의 원조격인 키드 오리의 밴드가 로스엔젤리스에서 처음 취입을 하였다. 악보 출판업자인 스파이크 형제가 프로모션하여 선샤인 레이블로 '오리즈 크리올 트럼본' , '소사이어티 블루스' 의 2곡을 발매했지만 뉴욕에서 커다란 호평을 받은 ODJB와는 달리 조금 히트하는 정도로 끝났다. 재즈 레코드는 1923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때의 레코드는 전부 한쪽 면에 3분 정도밖에 수록되지 않는 25cm SP판이었다. SP는 스탠더드 플레잉의 약칭이다.


결국 곡이나 연주가 표준 시간 연주인 3분간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고 녹음되었던 것이다. 이유는 재즈가 댄스 음악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그 동안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재즈의 발전과 더불어 감상 음악이란 요소가 증가되면서 그러한 시간적 제약은 족쇄가 되었다. 한 면에 한곡, 3분이라는 족쇄를 푸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재즈 레코드사에 큰 족적을 남긴 듀크 엘링턴 악단을 예로 들면 29년 1월에 '타이거 잭' 31년 1월에 '크리올 랩소디'는 30cm SP로 양면 재생, 32년 2월에 '무드 인디고' 외 6곡을 한 면에 3곡씩 메들리로 30cm, 33 1/3회전 LP(롱 플레잉)이고 35년 9월의 '레이니슁 인 템포'는 25cmSP 2매 4면 이었다. '무드인디고' 판은 연주 시간 11분 28초 수록으로 사상 처음 331/3 회전 LP이지만 음반 재료가 SP와 같은 셀렉으로 음질이 조악해서 이것을 개발한 RCA는 그때부터 불황과 겹쳐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작곡 면에서도 3분 타파를 시도해서 평가된 것이 '크리올 러브 콜' 이었다.


한편 부런스위크 레코드에서 장기간 레코딩 매니저와 A&R맨으로서 활약한 잭 캡은 34년에 동생인 데이브와 함께 데카 레코드를 성립했다. 이미 29년부터 영국의 데카가 존재하고 있어 당초에는 영국 데카의 지사격으로 존재하였지만 회사 방침이나 레이블의 디자인도 신생 데카의 독자 적인 컨셉트로 출발하였다. 첫번째 앨범이 발매 된 것은 빙 크로스비의 '아이 러브 유 트룰리'였다. 빙 크로스비와 잭 캡은 브런스위크 시절부터 친밀한 사이였고 그 회사를 떠날 때는 함께 떠난다는 약속을 할 정도로 교분 관계를 맺고 있었다.


빙 크로스비를 필두로 밀즈 브라더즈, 가히 롬 버드, 글렌 그레이 앤드 카사 로마 악단 등을 전 속으로 거느리고 있던 데카가 발전하여 빅터, 컬럼비아사와 더불어 3대 메이저로 부상했고 그가 성공한 원인은 아티스트들의 파워에 더불어 염가로 판매한 전략이 맞아 떨어졌으며 이 무렵 염가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한 컬럼비아의 보컬리온과 빅터의 블루버드 레이블이 함께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레코드 보급의 대중화에 대단한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같은 해 34년도 세계 최초의 재즈 전문 잡지인 '다운 비트(Down Beat)' 가 창간되었다. 당초에는 선전을 위한 일종의 PR지로 생명 보험을 가입시키기 위한 세일즈 매거진이었으므로 고객의 대상이 뮤지션 전문이었다. 그렇지만 다양한 업계의 뉴스가 게재되고 그런 뉴스를 찾고 있던 뮤지션들에게는 열심히 구독되어 오히려 채산성이 높다고 생각한 출판사는 편집과 발행의 방향을 바꾸어 격주간으로 발매되는 본격적인 뮤지션 필드의 전문 잡지가 되었고 또 팬 서비스로 인기 밴드의 가수들의 반 누드사진 등을 게재하여 인기를 유지하며 판매 부수를 확장시켰으며 이 후 지금까지 재즈 전문지로서의 명예와 긍지를 더욱 높이고 있다. 그럼 여기에서 다시 재즈 레이블의 명문 중의 명문 '블루 노트(Blue Note)'의 탄생을 알아본다.


유명한 프로듀서 존 하몬드의 1938년 12월 23일의 'Spirituals To Swing Concert' 중 첫번째의 부기우기 피아노에 대단히 감격한, 독일에서 출장온 청년 알프레드 라이온은 연주가 끝나고 휴게실을 찾았다. 두 사람의 피아니스트와 녹음할 것을 약속하고 그 다음해에 녹음과 레코드 발매를 실현시킨 것이다. 레이블 명은 'Blue Note' 로 하고 39년 봄 첫번째 신보로 발매된 것이 미드 룩스 루이스의 '멜랑콜리' 와 알버트 아몬즈의 '부기우기 스톰프' 였다. 그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30cm SP판으로 각각 50매씩을 프레스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명문 블루 노트가 탄생하여 지금까지 명문다운 바이탈리티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From Spirituals to Swing Concert'에 대해서 잠시 살펴본다. 1938년 크리스마스 전전날 즉 12월 23일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는 연초에 있었던 베니 굿맨 악단에 이어 재즈 팬들은 열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미 재즈 사상에 담긴 업적이 지대한 존 하몬드가 전력을 다해 개최한 콘서트이기 때문에 더욱 흥분하였다. 콘서트의 타이틀과 같이 당시 최고의 절정기를 맞은 스윙 재즈의 뿌리와 역사를 테마로 한 콘서트로서 아프리카 음악을 현지에서 녹음한 것을 오프닝 넘버로 하고 라스트의 카운트 베이시 악단까지 약 3시간 반에 걸친 귀중한 연주와 열연이 펼쳐졌다. 그 때 피트 존슨 미드 룩스 루이스, 알버트 아몬즈 등 세 사람의 부기우기 피아니스트들이 협연도 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부기우기 붐이 일어나 그 이후 4년 남짓 크게 유행했었다. 이 콘서트의 대성공으로 다음해 3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제 2회의 콘서트가 같은 타이틀로 개최되었다.


38년 콘서트에서는 출연자 모두가 흑인이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베니 굿맨은 흑백 혼합 밴드로 등장하여 첫 회 공연에 버금가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베니 굿맨, 카운트 베이시라는 당시로는 첨단을 걷던 인기 악단으로부터 그 동안 묻혔던 재즈사의 산 증인들과 스피리츄얼, 블루스 장르의 뮤지션들까지 한꺼번에 연주한 진정으로 역사에 남을 명콘서트였다. 그때의 실황을 녹음한 레코드가 2장 1세트로 59년 봄에 뱅가드(Vanguard) 레코드사로부터 발매되었다.

1936년 여름 캔사스 시티에서 일어난 일이다. 16세의 소년 알토 색소폰 주자가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주요 멤버들의 잼세션 현장에 달려와서 동참하게 되었다. 레스터 영이 허락했던 모양이다. 몇 번인가 레스터 영의 대기실로 찾아왔던 그 소년이었다. 소년은 연주에 몰두하면서 자기의 솔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때, 심벌이 댄스 플로어 반대편에 던져졌고 요란한 음을 내어 소년의 연주를 방해했다. 이는 당시 베이시 악단의 명 드러머 조 존스의 소행이었다. 소년은 연주를 멈추고 악기를 챙겨 돌아가면서 말했다. "지금은 나를 비웃고 있지만, 원수가 되었으니 조만간 다시 봅시다"라는 막된 말을 남기고 레스터 영의 레코드 몇 장만을 가지고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소년은 바로 모던 재즈의 비조 찰리 파커였다.


그 다음해(37년) 가을에 캔사스 시티로 돌아온 후부터는 버스터 스미즈, 제이 맨샌 악단에서 몰라보게 달라진 연주를 하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 이미 40년대를 향한 버드의 비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JohnBirks 'Dizzy' Gillespie는 35년 고향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쉐로우(Cheran)에서 필라델피아로 이사하였다. 당시 17세로 프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그 무렵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로이 엘드리지의 트럼펫 연주를 듣고부터 그를 우상으로 삼게 되었다. 로이 엘드리지가 테디 힐 악단의 스타 트럼펫 주자로 활약하고 있던 시기로 길레스피가 라디오를 들었던 것은 테디 힐 악단의 사보이 볼룸에서 한 연주였다.

 

그 꿈의 테디 힐 악단이 길레스피의 레코딩 데뷔의 무대가 되었고 더구나 로이 엘드리지의 대역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어쩌면 이미 점지된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길레스피는 럭키 밀린더로부터 부름을 받고 뉴욕으로 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막상 와 보니 차질이 생겨 일을 할 수도 없었고 부아가 울컥 치밀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테디 힐이 뉴욕에 나타났다. 그리고 말하기를 "로이 엘드리지가 시카고에 있는 플레쳐 핸더슨 악단에서 스카웃해 가버렸으니 자네가 로이 대신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래서 길레스피는 코트를 걸치고 장갑을 낀 채로 테디 힐의 눈에 들어 그대로 세컨드 트럼펫 주자로 앉게 된 것이 무리는 아니다. 디지는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과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던 탓인지 수많은 희롱과 눈총 속에서도 37년 5월 빅터 레코드의 녹음에 참가하게 되었다. 솔로 파트도 받게 되어 여기에서 비밥 혁명의 한쪽 날개인 디지 길레스피의 첫 녹음이 시작되었다. 그의 연주에는 분명히 로이 엘드리지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전술한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의 소상한 내용은 다가올 비밥 시대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 잠시 유럽으로 건너가 한 천재 기타리스트를 만날까 한다. 천재 짚시 기타리스트로서 알려진 벨기에 출생의 장고 라인하르트는 1928년 11월에 짚시 캐러맨의 화재로 왼쪽 손을 쓰지 못하게 된 핸디캡을 극복하고 30년대에는 파리에서 그만의 독자적인 주법을 가지고 연주하여 이름을 드날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가 프랑스의 재즈 연구 단체인 핫 클럽 두 프랑스의 후원으로 바이올린의 스테판 그라펠리와 만나, 프랑스 핫 클럽 5를 결성하였다. 프랑스에서도 이미 재즈는 성행하고 있었으며 오리지낼리티를 가진 연주자로서는 장고 라인하르트만이 프랑스를 방문하는 등 미국 재즈맨들의 좋은 평판을 받았다. 이 무렵 장고와 공연한 재즈 맨은 많다. 예를 들면 콜맨 호킨스, 베니 카터, 바니 비가드 등이 있고 이들과 녹음한 걸작들도 많이 남아 있다.

 

또 현악기만의 캄보 사운드는 유니크하고 노스탈직한 맛이 있다. 하지만 장고가 미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그 얼마 후인 46년 유럽 순회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게 된 듀크 엘링턴이 데리고 온 후부터였다. 30 년대 재즈 즉, 스윙 시대에서 꼭 알고 넘어가야 할 명 테너 색소포니스트가 있다. 전술한 바 있는 콜맨 호킨스이다. 1904년에 태어난 콜맨 호킨스는 24년부터 블루스 가수 마미 스미스의 반주 캄보 밴드인재즈 하운즈의 일원으로서 뉴욕에 온 것이 계기가 되어 23년 여름에 스타트한 플레쳐 핸더슨 악단에 입단하였다. 같은해 루이 암스트롱 이어서 돈 레드맨이 추가로 입단하는 등 여기서 핸더슨 악단의 빛나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호킨스는 이 악단의 스타 솔로이스트가 되고 이 시기에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것은 레스터 영이 출현하기 이전의 단 하나의 재즈 테너 색소폰 스타일이다. 34년 그는 생각한 바가 있어 유럽으로 건너갈 결심을 한다. 헨더슨으로서는 대단한 아픔이었지만 그는 퇴단하고 유럽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외에도 여러 나라를 돌면서 약 5년간 체재하는 동안 장고 라인하르트와 공연하는 등 여러 가지 체험을 하고 39년 7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귀국 길에 올랐다. 귀국하자마자 레코딩의 스케줄이 결정되어 10월 블루버드에서 녹음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그의 불후의 명연주 'Body and Soul'이 태어난 것 이다. 이 레코드의 대 히트로 호크(콜맨 호킨스의 닉 네임)는 이전보다 오히려 재즈 테너 색소폰의 최고봉임을 과시하게 되었다.


1929년 대공항의 타격이 어느 정도 여파는 있었지만 그런 대로 회복세에 접어든 31년 뉴욕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세워지고 거리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Cloeman Hawkins in Kelly's Stable dressing room, New York, 1939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이 적중하여 부흥을 한 33년, 이해에는 17세의 불세출의 천재 가수 빌리 할리데이의 존재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의 멜로디 메카라는 잡지를 통하여 세상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 인기 라디오프로그램으로 '유어 히트 퍼레이드' 가 시작된 35년은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포 기와 베스' 가 초연 되고 베니 굿맨을 필두로 스윙 시대의 막을 올렸다. 39년에는 뉴욕에서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었고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으며 부기우기 피아노를 제2탄으로 블루 노트 레코드사가 발족하기도 했고 프랭크 시나트라가 해리 제임스 악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결국 스윙은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나타났고 라디오, 레코드, 영화의 비약적인 보급과 발맞추어가며 30년대 후반의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을 만들어 내었다.


오는 신인 가수 빙 크로스비의 목소리에 매료되기도 했다.
또한, 스윙과 재즈라는 2개의 단어는 동의어적으로 취급되기도 했으며 파퓰러한 존재가 된 스윙 재즈의 뿌리를 찾는 움직임도 활발해 38년, 39년 2회에 걸쳐 카네기 홀에서 실시한 'From Spir ituals To Swing Concert' 는 특별한 이벤트로 기록되고, 부기우기 붐을 부산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30년대는 저물고 재즈사의 일대 전 환기이며 스윙 재즈의 황금 시대 퇴조와 비밥의 태동, 쿨 재즈의 탄생 등과 제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와는 무관한 재즈 맨들의 분주한 교분 관 계 등 모던 재즈의 시작을 예고한다.

재즈 평론가, 칼럼리스트 / 최 영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