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기/즐~ 국악

가야금 병창의 명인 함동정월

이 상용 2009. 12. 4. 18:43

 

함동정월 (1917-1995)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및 산조분야 기능 보유자 (1976)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및 산조분야 기능 보유자는 (본명)함금덕  이다.

 

함씨는 전남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 527번지에서   1917년(대정6년) 10월 24일 부-함일권  모-박양근 의 4녀로 출생하여 12살때 조선시대의 유일한 예술 교육기관이었던 권번에서 가야금, 무용, 시조 등 기초과정을 배웠다. 일년 후 김복술에게서 가곡을 익히고 오수암과 김군옥에게는 판소리를, 최옥산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19세때 일본의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에서 주최한 콩쿨대회에서 최연소자로 1등의 영광을 차지한 그는 그 해 가을 일본으로 건너가서 50여일간 머무르며 판소리와 가야금 산조, 가야금 병창을 12장의 레코드에 취입하였다


  

 

  

함동정월의 음악과 일생


함동정월(咸洞庭月, 본명:咸金德, 아호:昭芸)은 1917년 8월 25일(음력) 전남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에서 아버지 함일권과 어머니 박양근 사이의 2남 5녀 중 여섯째(넷째 딸)로 태어났다. 함동정월의 부친은 판소리 북, 피리 명인이었고 외삼촌인 박창주는 판소리, 가야금 명인이었다. 함동정월의 외삼촌 박창주는 국악 작곡가 박범훈의 조부이며 가야금산조 명인 최옥산은 함동정월의 육촌 형부 뻘이 된다. 그리고 함동정월의 큰 오빠 함률도 젊어서 대금과 가야금에 재능을 보였다 한다. 함동정월의 뛰어난 음악 재능은 이와 같은 집안 내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함동정월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11세 때 광주 갑부 김창수의 양녀가 되었고 국악으로 돈을 벌기 위해 광주권번에 들어갔다. 이 때 함 명인은 그 권번에서 1년 6개월 동안 박모(朴某) 등의 문하에서 시조, 양금, 가야금, 승무, 검무 등을 배웠다. 그는 광주권번에서 수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12세 때 김복술 문하에서 가곡을 배웠다. 그리고 김군옥(김채만 제자) 문하에서 적벽가, 흥보가 토막소리를 배웠고 임공교(공창식 제자)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그 후 최옥산 문하에서 가야금산조와 병창을 사사받았다. 16세 때 동아일보 목포 지국장이었던 방모(方某)가 함 명인에게 머리를 얹어주고 중국 동정호에 뜬 달처럼 예쁘다고 하며 [동정월]이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목포권번에서 예기 수업을 받았다. 19세 때는 오수암(김창환 제자) 문하에서 춘향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함동정월은 지금으로 부터 60년 전인 1936년에 일본 콜럼비아 음반회사가 광주에서 개최한 콩쿨 대회에 참가하여 판소리로 입상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콜럼비아에서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다음은 함동정월의 유성기음반 취입 회고담이다.

 

  <<목포 무안에 목우암이라는 절에서 판소리 백일 공부 또 했어. 나는 오수암 선생하고 판소리 (공부하러) 가고 오수암 선생한테 춘향전, 심청전 배웠어. 다는 못 배웠지, 목우암서 백일 공부하고 와서 한 두어달 쉬니까 광주에서 콩쿨 열린다고, 동경 콜럼비아 회사에서 콩쿨 연다고 해. 콜럼비아 회사 문예 부장이 한국 사람이었어. [다를 이]자 이하윤 씨였어. 동국대학 학장으로 계셨어, 나중에. 그래서 콩쿨 나가라고, 권번에서 꼭 나 혼자만 가래, 광주로. 그래 광주로 갔더니 광주에서 뭐 훌륭한 사람들 죄 나왔잖아? 신광원인가 큰 방, 손님 많이 와서 연회하는 데럴 다 치워 놓고 거기서 콩쿨 했어. 열아홉살 먹던 봄이야. 공부 시작한 지 칠년 만이지. 그러더니 광주 사람 하나도 안 뽑히고 제일 어린 내가 뽑혔대. 그래서 일본 간 거야. 울며 겨자 먹기로. 난 공부 더해 갖고 간다 그랬어. 지금은 어리니까 안하겠다고. 그랬더니 안된다고 꼭 좀 하러 가야 한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갔어.

 

  열아홉 가을에 일본에 가서 취입했어. 일본에 가니께 여관 있지. 기누꾸니아 라는 호텔이 있는데 일본에서 취입할 때 오십일 있었어. 정금도, 김인숙, 고재덕이, 이중선이, 여럿이 갔었어. 취입한 건 춘향전, 심청전 다 했지. 주로 판소리. 삼분짜리, 그 때는 삼분이야. 가야금도 산조 중중머리하고 자진머리 좀 넣어주고. 근디 고수가 맘에 안 들었어. 거기 심바시 가니까 아사쿠사 공원 뒤에 한국촌이 있었거든. 거기 있다 하면서 여기서 고수럴 못 데려 가게 하더니, 가 보니까 그 사람이 치기는 친디 너무 호흡이 안 맞어. 그래서 애 먹었어 레코드 판에는 내 독소리만 넣었어. 춘향가, 심청가, 가야금산조, <육자배기>, <흥타령>까지, 병창까지 다 했어. 병창은 <청산얼 가만히 바라보니> 그거 넣었지. 춘향이가 이별 다 하고 혼자 앉아서 청산 바라보고 임 그리며 우는 대목이여. 그때 그거 나와서 참 힛트했대. 나도 아직 갖고 있는데 누굴 빌려 줬드니 안 주데.>>

 

(함동정월 구술, 김명곤 김해숙 편집 {물은 건너 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 봐야 알거든} 서울:뿌리깊은나무, 1991, 49∼52쪽)

 


 

 

  함동정월은 목포 사람 박준규를 만나 19세 때 첫 애를 낳았고 21세까지 목포에서 살다가 어머니의 말에 따라 서울 조선권번에서 잠시 활동했다. 이 때 서울 갑부 정모(某)의 다섯번째 소실로 들어가서 22세부터 27세까지 아들 셋, 딸 하나를 낳았고 27세 때 온양으로 이사하여 6.25 때까지 살았다. 함동정월이 최악의 인연으로 여긴 김수정은 이 때 정모의 네번째 소실이었다. 김수정(金水晶)은 가곡의 대가인 하규일(河圭一) 문하에서 가곡을 배웠고 일찌기 가곡, 춤으로 이름을 날려서 일본 콜럼비아 음반회사에서 스승인 하규일과 함께 <연락곡>, <화편>, <평조회상>과 같은 정가 유성기음반을 취입한 바 있다. 함동정월은 6.25 때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으나 둘 다 일찍 죽었고 6.25 전쟁을 겪은 후 38세 때 대전으로 이사하여 막내 아들을 낳았다. 대전에서는 국악원을 차려 원장을 하면서 이때부터 정모와 함께 산 후로 놓았던 가야금을 다시 시작했고 나성엽과 김초향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41세 때 정모와 헤어지고 아이들과 함께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이 때 함동정월은 정악원에서 시조를 배웠고 박초월 문하에서 판소리를 익혔다. 그리고 53세부터 57세까지 명고수 김명환과 함께 살면서 음악 교류를 가졌다. 함동정월은 1970년대 초반부터 작고할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함 명인의 막내 아들 정보환을 비롯해서 김해숙, 이경자, 김일륜, 윤미용, 나현숙, 성애순, 김정자, 이재숙, 황병기, 황병주, 이영희, 박재희, 정회천, 김상순, 신영균 등이 함동정월 문하에서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함동정월은 1980년 11월 1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가 뛰어난 기량을 지녔으면서도 뒤늦게 인간문화재가 된 것은 공연, 방송 등에 별로 나서지 않고 묻혀 지냈기 때문이라 하겠다.

 

  여러 선생들 중 함동정월은 특히 자신을 예뻐해주고 가야금산조 실력가인 육촌형부뻘되는 최옥산에 대한 기억이 남달랐다.  "성음이 빡빡하니까 얼른 감정이 드러나진 않지만 가진 생각이나 포부가 간사하거나 간유하지 않아서 좋다"며 "성실하고 근면하고 머슴같이 일할 줄도 안다"등의 표현에 나타나듯 스승 최옥산에 대한 생각은 좋다.  후에성음이 예쁘고 음악성도 뛰어나서 선생보다 산조를 더 잘탔다고 평가받건만 함동정월은 다른 류의 산조에서 처럼 선생가락에다 자기 가락을 만들어 넣지를 않았다.  예술에 정진한지 칠년만에 그녀는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사에 가장 어린 나이로 발탁되어 판소리 '육자배기' 가야금산조를 취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창때에 가야금산조의 연주자로서보다는 육자배기의 명창으로 소리의 명창으로 더 환영받았다. 

 

  열한 살 무렵 광주권번시절부터 병영 독공부시절 예기로 활동하던 스무살 무렵까지가 함동정월에게는 음악생활의 황금기가 되었다.  오로지 예술에 정진하는 마음으로 그 자신을 갈고 닦았으며 어린 나이에 세상으로부터 음악성을 인정받았고 명성도 얻었으며 돈도 벌었던 시절이 그 무렵이었다.   그 뒤로 스무살 적부터 이십몇년 동안에 걸쳐서 그녀의 삶은 음악과는 무관하게 이어지며 여러남자와의 악연으로 쓰디쓴 고초를 당했다.  어린 자식과 함께 돈 한푼없이 길거리로 쫓겨나기도 하며 예술을 할래야 할 수 없는 상황들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권번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기생들> 

 

  우리나라의 역사로 봐서도 이 시절은 일제 침약과 6.25전쟁, 5.16군사 쿠제타 등 수없는 격랑과 혼란을 거듭하던 시절이었으니 세상살이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간다.  혼인에 실패하고 나서 삶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은 함동정월이 서른여덟살 되던 무렵 곧 대전국악원 시절에 시작되었다.  여기저기 연주도 해주고 국악원에서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사기를 당한데다 세태가 달라져 그이의 예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자 그녀는 예술에 대해 배반감을 느끼고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동안에 먹을 것이 없어서 쌀겨를 주어다가 까불어 먹고 어묵공장에 들어가서 일하기도 하는 등 힘겨운 생활을 계속했다.

 

  오십살이 넘어 정악원에서 시조를 공부하면서 명고수 김명환을 만나 거기에서 그녕의 예술적 전기가 마련된다.  함동정월의 음악성에 탄복한 김명환은 명창을 소망하는 함동정월에게 가야금산조를 권유하게되고 4년의 세월을 같이 했으나 곤궁한 현실과 불 같은 저마다의 성질 때문에 헤어지게 된다.  이후 김명환은 만개한 꽃처럼 각광받는 생활로 이어졌지만 함동정월은 젊은 시절 겪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만년에 심한 피해 의식에 시달렸다. 남자들로 부터 버림 받고 극심한 경제고에 시달려야 했고 정신적 지주인  1977년 막내 아들의 자살, 1979년 자신의 교통사고, 1989년에는 그 녀의 삶을 주제로 한 [춤추는 가얏고]라는 소설과 드라마로 인해 더욱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만년에는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렸고 동네 사람들로 부터 욕쟁이 할머니, 심지어 미친 할머니라는 말까지 들었다. 찾아간 사람도 1989년 겨울 함 명인을 만나러 갔다가 동네 아주머니들로 부터 그런 욕설을 들었고 함 명인의 며느리로 부터 만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문전에서 발 길을 돌려야 했다. 1994년 10월 12일 함동정월은 서울 면목동에서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셋집을 전전하는 괴로운 생활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율의 고장인 병영에서 태어나 음악인 집안의 후손으로 예술에 죽도록 정진 한 함동정월에게 이 사회가 준 마지막 훈장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란 이름일 뿐이었다.

 

  변변한 독주회 한번 제대로 갖지 못한 채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형편이 나아지면 고아원을 만들고 싶다던 그는 인간문화재 인증서를 걸어 놓은 셋방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갔다. 우리나라 초기 인간문화재들의 만년 모습이 그랬듯이 그도 또한 그랬다. 함동정월은 오늘날 가야금산조 명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악기와 민요, 정가, 무용을 두루 잘했다 한다. 최근 콤팩트디스크에 복각된 그의 다양한 음악들을 들어보면 생전에 그가 한 말대로 그가 가야금산조뿐 아니라 가야금병창, 판소리, 남도민요에도 많은 애착을 가지고 공들여 수련했음을 알 수 있다.

 


음반 녹음

 

  그가 만년에 추억에 잠겨서 예전에 내가 이런 소리도 잘했었지 하고 자랑 삼아 얘기했던 <범피중류>, <갈까보다>, <육자배기> 등이 전해오는 콤팩트디스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음반은 함동정월의 초기 모습과 그의 폭넓은 예술적 역량을 실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콤팩트디스크에 복각된 녹음과 유성기음반 가사지에 적힌 기록 등을 검토해 볼 때 유성기음반 취입에 대한 함동정월의 기억은 거의 정확했다. 녹음 시기를 비롯해서 함께 취입하러 간 사람들, 취입 곡목이 기록과 일치했다. 상기 증언에 의하면 함동정월은 콜럼비아에서 음반을 취입할 때 일본에 살던 사람이 고수를 맡았는데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 콜럼비아 회사 측에서 일본에 고수가 있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고수를 못 데려 가게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취입 경비를 줄이려고 그리 한 것 같다.

 

   함동정월의 유성기음반에 장고 반주자로 참가한 사람은 김성채와 정금도 두 사람이다. 그 가운데 함동정월이 호흡이 맞지 않았다고 말한 고수는 김성채일 것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고수 가운데 함동정월이 말하는 고수는 당시 일본에 살았다고 하는데 정금도는 함동정월과 함께 일본에 음반을 취입하러 갔다고 했기 때문이다. 김성채(金成彩)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김성채는 함동정월의 유성기음반에서만 이름이 나타나며 함동정월이 가야금산조, 병창, 판소리, 남도민요를 취입한 7장의 유성기음반 가운데 남도민요 음반 1장을 제외한 나머지 6장의 음반에 장고 반주자로 참가했다. 함동정월의 남도민요 음반 1장은 정금도가 장고 반주를 맡았다. 함동정월은 이 콤팩트디스크에 복각된 가야금산조, 병창, 판소리, 남도민요 유성기음반 7장 외에도 다음과 같이 음반 2장에 장고 반주를 녹음한 바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


Columbia 40755(1 22429)

西道雜歌 黃海道山念佛 鄭錦桃

細笛高載德 奚琴李忠善 長鼓咸洞庭月

Columbia 40755(2 22440)

西道雜歌 자진배 라기 鄭錦桃

細笛高載德 奚琴李忠善 長鼓咸洞庭月

Columbia 40758(1 22427)

民謠 豊年歌 鄭錦桃

細笛高載德 奚琴李忠善 長鼓咸洞庭月

 

Columbia 40758(2 22428)

民謠 京興打鈴 鄭錦桃

細笛高載德 奚琴李忠善 長鼓咸洞庭月

 
  당시의 관례 대로라면 콜럼비아에서 한번에 여러 녹음을 해놓은 후 몇 달 간격을 두고 한 장씩 나누어 발매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함동정월은 1936년에 콜럼비아에서 한 차례 취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함 명인은 일제 때 콜럼비아에서만 음반을 취입했고 다른 회사에서는 유성기음반을 내지 않았다. 따라서 함동정월의 일제시대 녹음은 이 콤팩트디스크에 복각된 콜럼비아 유성기음반에만 남아있다. 1993년에 신나라레코드에서 일본 콜럼비아 음반회사에 보관되어 있는 함동정월의 유성기 원반 가운데 <편시춘>과 <갈까보다>(상사가) 녹음을 불법으로 복사하여 {가야금병창 명창들(2)} 음반(신나라 SYNCD-055, 1CD)에 복각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 함동정월의 유성기음반만 모아서 독집 음반으로 복각하기는 이번에 엘지미디어가 제작한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병창 판소리 남도민요} 음반(LGM-AK009, 1CD)이 처음이다. 유성기음반에 취입된 함동정월의 가야금산조는 만년 연주보다 속도가 빠르고 가야금병창, 판소리, 남도민요의 경우에는 당시 국악인들에 비해서 모두 느리게 불렀다. 당시 국악인들은 요즘보다 음악을 빠르게 부르고 연주하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함동정월의 가야금병창, 판소리, 남도민요 유성기음반을 들어보면 요즘 사람들과 거의 같은 속도로 불렀다. 가야금산조는 굿거리와 느린 자진모리 장단을 녹음했고 판소리, 가야금병창, 남도민요는 진양조나 중모리로 된 느린 곡만 녹음했다.

 
함동정월은 1936년에 콜럼비아에서 취입한 후 50여년 동안 음반을 취입하지 않았고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1980년 이후에 다음과 같은 음반을 냈다.(노재명, 가야금산조 음반에 대하여{韓國音盤學 제4호} 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1994, 451∼489쪽)

  

 


0.1984년 現代音盤株式會社 HSJ민28(1MC) - 함동정월 가야금산조(북:김명환)

0.1985년 국악보급진흥회-한국의 전통음악 - (38MC 중 9번 테입) 함동정월 가야금산조(북:김명환)

0.1989년 뿌리깊은나무-산조 전집(SEL-RO137, 9LP 중 2번 음반) - 함동정월 가야금산조(북:김명환) (1995년에 킹레코드 CDD-002, 1CD로 재발매됨)

0.1994년 킹레코드 SYNCD-062(1CD) - 함동정월 가야금산조(북:김명환) 이밖에 다음과 같이 음반으로 제작되지 않은 릴 테입 녹음이 여러 벌 남아있다.

0.1970년대 초반 가정집에서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녹음 - (북:김명환, 소장:한영서)

0.1981년 제1회 대한민국국악제에서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녹음 - (장고:김동준, 소장:한국문화예술진흥원)

0.1984년 제15회 인간문화재대전에서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녹음 - (장고:김동준, 소장:한국문화예술진흥원)

0.1980년대 후반 가정집에서 함동정월 가야금산조 녹음 - (장고:정철호, 소장:심우성)


참고- 가야금 병창

 

  창(唱)에 가야금 연주가 곁든 연주형태로 노래와 반주를 한 사람이 겸한 것으로 창이 주가 되고 가야금은 부가 된다.  기원은 남도에서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가 발생할 무렵 함께 발생한 것으로, 당시 가야금산조로 이름을 떨치던 연주가들은 대부분 가야금병창을 겸하였다.  가야금이 노래의 반주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삼현삼죽(三絃三竹)에서 비롯하여, 고려가요 및 조선시대의 가곡에까지 전통을 잇고 있으나 모두 병창은 아니었다.  그 예로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실린 신라시대의 연주형태를 보면 모두 금척(琴尺:가야금잡이)·무척(舞尺:춤잡이)·가척(歌尺:노래잡이)으로 구분되어 있어 가야금잡이는 가야금만 탔을 뿐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이처럼 서로 독립되어 있던 금(琴:가야금)과 가(歌:노래)가 조선 후기에 와서 가야금산조의 명인 김창조(金昌祖)와 박팔괘(朴八卦) 들에 의하여 병창이 시도되었다고 하나, 일설에는 그들 이전에 민속악을 연주했던 가야금잡이들에 의하여 이미 시도되고 있었다고 한다.

 

  가야금병창에 부르는 노래들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가나 판소리 중의 한 대목, 또는 민요 등을 가야금의 선율에 맞게 기악화하거나, 가야금의 선율을 노래의 선율에 제주(齊奏)한 것이다.  그러나 가야금은 노래를 따르는 것이 원칙이고 소리가 없는 공간을 기악선율로 메우거나, 가끔 간주를 넣어 흥을 돋우는 것이 대부분이다.  가야금병창으로 중요한 레퍼토리는 단가 중 《호남가(湖南歌)》 《녹음방초(綠陰芳草)》 《청석령(靑石嶺) 지나갈제》 《죽장망혜(竹杖芒鞋)》 등이고, 판소리에서는 《춘향가》 중 <사랑가>, 《흥보가》 중 <제비 노정기(路程記)>, 《수궁가》 중 <고고천변(皐皐天邊)> <가자 어서 가> 등이다. 항상 장구의 반주가 딸린다. 1968년에 산조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고, 예능보유자로는 박귀희(朴貴姬:본명 吳桂花)·김난초(金蘭草)·함금덕(咸金德)이 지정되었다.

 

함동정월류 가야금 산조에 대한 짧은 소개

 이 산조의 모태가 된 것은 최옥산의 가락이다. 그의 호적명은 최옥삼이며, 보통 최막동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김창조(1868-1919)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웠다고 전한다. 농사도 지은 적이 있는 최옥산은 늘 하루 일과가 끝나면 손을 깨끗이 씻고 한바탕을 탔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키가 크고 힘이 좋았으며, 그러기에 그가 연주하는 가야금줄은 다른 사람이 만질 수 없을 정도로 팽팽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의 산조는 지금도 줄을 팽팽하게 죄고 조금 낮게 조율하고 타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전체적으로 다른 산조에 비해서 묵직하면서 점잖은 편이다. 그러나 농현을 깊게할 경우에는 매우 깊은 감정이 배어 나오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산조의 경우 중중모리가계면조로 된 점에 비해, 이 산조에서는 우조의 힘과 기가 느껴진다. 특히 자진모리에서는 긴박감이 느껴지는데, 수천 마리의 말이 자갈길을 달리는 연주하라는 얘기도 전해온다.

 

  1917년 8월 23일 태어난 함동정월은, 열두살 되던 시절에 광주권번에 들어가 전통예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재기와 미모가 뛰어났던 그는, 가야금 병창 가곡 등에서 두루 일찍부터 이름을 날렸다. 원래의 이름은 함금덕인데, 동정월(洞庭月)이란 예명은 이후 목포권번에서 얻게 된 예명이다. 그는 결혼과 생활고 때문에 오랫동안 음악계를 났었다. 그러다가 1960연대 말 고수 김명환과 만나 함께 살면서, 이 최옥산의 가야금 가락을 과거의 기억을 되찾아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1980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지정되었다. 그러나, 1979년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심리적인 불안정 및 현실에 대한 불만 등으로 해서 말년에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1994년 10월 12일,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과거, 어린 이영신이 박귀희선생의 댁에서 지내며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일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이 시절, 박귀희와 함동정월의 사이는 각별했다. 함동정월이 어려웠던 시절에 박귀희선생이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영신에게 배워오도록 했고, 이로 인해서 이영신은 함동정월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후기(제언) 지금 병영에 오면, 그녀가 출생한 집과 그녀가 병영에 있을 당시 재능을 익히던 가옥과 그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일생을 연구하여 학위를 취득한 논문들을 확인 할 수 있다.

 

  병영이라 하면 군인들의 주둔지라는 딱딱함에서 벗어나 해암-김응정의 시조, 더불어 가야금 산조 기능인-함동정월이 나고 자라고 기능을 익힌 곳을 복원하고 그녀에대한 자료도 수집하여 조명하고 알리는 것도  병영성복원, 하멜기념사업과 함께 병영을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와 알거리를 제공 할 수 있어 관광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 해 본다.


 

 

 

- 춤추는 가얏고 (TV) 1990 장수봉 고두심, 오연수 MBC 프로덕션- 가야금 명인 함동정월의 삶을 근거로 한 국악인의 인생을 그린 드라마 

 

 

   

 함동정월님의 상사가

 


 
가야금병창 <편시춘> : 가야금병창 함동정월

 

 



함동정월류 가야금 산조 : 가야금 함동정월, 북 김명환




최옥산류 가야금 산조 : 가야금 김일륜, 장고 장종민

* 위 두가지 산조는 최옥산에서 함동정월을 거친 같은 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