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 박 초월
이름 박초월(朴初月, 본명 박봉례) 출생 1917년 2월 20일~1978년 11월 26일/남원군 운봉 전문분야 장기는 흥보가·춘향가·수궁가 특히 창극 춘향전의 춘향모역은 당대의 제일인자
-구분 문화재관련정보 수궁가 보유자1964.12.24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 인정1978.11.26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 사망해제
학력(계보) .1927년 12세 때 명창 김정문을 사사하여 흥보가로 소리의 기초를 닦음 .1931년 그후 국창 송만갑의 지도 아래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이수연마 .박봉래, 박중근에게 춘향가 사사 .조통달(趙通達) 최초의 남성 후계자를 길러냄
-생애 .1916년 남원군 운봉에서 태어남 .12세 때 명창 김정문을 사사하여 흥보가로 소리의 기초를 닦음. .이후 국창 송만갑의 지도 아래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사사 .1932년 전주에서 개최된 전국남녀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당당 일등상, 여류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는 계기 .오케 레코드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흥보가를 음반에 취입 .포리돌 회사에서도 3년 계약으로 흥보가·심청가 취입 .빅타에서는 이에 질새라 춘향가를 음반취입 .약관 20세 전의 일이었다고 함. .1933년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 입회 .1939년 동일창극단으로 옮겨 박귀희(朴貴姬)와 함께 짝이 되어 주인공역 .1955년에 박귀희와 함께 대한민속예술원을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역임 .1966년부터 자택에서 156위의 신주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모심 .1964년 재일동포 위문공연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수궁가 기능보유자로 지정 .1976년에는 서베를린 국제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수궁가 전편을 연창 .1979년 서울시 문화상 국악부문을 수상 .1984년 10월 20일에는 대통령훈장을 수여 .66세에 숙환으로 자택에서 별세 .조통달(趙通達) 최초의 남성 후계자를 길러냄
-특징 어려서부터 가요의 천재라 불리울 만큼 성음이 청미하고 성량이 또한 풍부
-명창해설 박초월(朴初月)은 1916년 남원군 운봉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가요의 천재라 불리울 만큼 성음이 청미하고 성량이 또한 풍부하였다. 12세 때 명창 김정문을 사사하여 흥보가로 소리의 기초를 닦고, 그후 국창 송만갑의 지도 아래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이수연마하면서, 1932년 전주에서 개최된 전국남녀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당당 일등상을 받았으니, 이것이 그녀가 여류 명창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였으며 출세의 첫발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당시의 오케 레코드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흥보가를 음반에 취입하게 되자, 포리돌 회사에서도 3년 계약으로 흥보가·심청가를, 빅타에서는 이에 질새라 춘향가를 음반취입하였다. 이것이 다 약관 20세 전의 일이었으니 그야말로 운을 타고난 자랑이요 명예라고 할 것이다.
박초월은 그후로도 송만갑을 배종하면서 예도에 정진하였는데 침식을 잊고 너무 무리한 탓으로 목이 가라앉고 말았다. 박초월의 일취월장하는 기량과 명성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듣거라 하는 듯이 「한번 주저앉은 목은 절대로 잡지는 못한다」하고, 떠벌리며 빈정거렸다. 그러나 박초월을 아끼는 스승과 선배는 「기력이 쇠진하면 목이 가라앉는 수가 있다」고 하면서 하루 속히 원기를 회복하도록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과연 그말이 옳았다. 박초월은 몸을 보양하고 조리하여 심신이 회복되자 성대도 좋아져서 그녀의 지닌 바 본래의 성음을 되찾게 되었다. 1933년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 입회하고, 한때 대동가극단에서 이화중선과 어깨를 겨루며 이름을 떨치다가, 1939년 동일창극단으로 옮겨 박귀희(朴貴姬)와 함께 짝이 되어 주인공역으로 그 인기는 절정에 달하였다. 박초월은 해방 후 1955년에 박귀희와 함께 대한민속예술원을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1964년 전국악인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선대 명창의 위령제가 비로소 서울 거주의 몇몇 창악인들의 정성으로 베풀어졌는데, 그것도 그해 단 한번으로 그치게 되자 박초월은 1966년부터 자택에서 156위의 신주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모셔 왔다. 박초월은 국악학원을 설립하고 후배들을 지성껏 지도하면서, 1964년 재일동포 위문공연을 하여 그녀의 이름이 일본의 교포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더욱 유명하였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수궁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976년에는 서베를린 국제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수궁가 전편을 연창하였는데, 그 초인적인 정력과 절창으로 운집한 외국 청중의 탄상과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아, 우리 전통예술의 우수성을 과시하였던 것이다. 1979년 서울시 문화상 국악부문을 수상하였고, 1984년 10월 20일에는 대통령훈장을 수여받아 국악인 최고의 영예를 한몸에 지니는 영광을 자랑하게 되었다. 박초월은 66세에 숙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하였으나, 그녀의 문하에서 명창 후보가 많이 배출되었고, 개중에도 조통달(趙通達)은 그녀의 의발을 계승한 것인데 여자를 스승으로 하여 명창의 반열에 끼게 된 최초의 남성 후계자가 되었다. 박초월의 장기는 흥보가·춘향가·수궁가였으며, 특히 창극 춘향전의 춘향모역은 당대의 제일인자였던 것이다. (자료출처 : 박황, 『판소리 이백년사』)
-관련기사 박초월과 소리
박초월 선생님은 남달리 목에 표목과 그늘이 다르십니다. 목구성이 천구성이요, 목소리가 대금소리 같이 묘한 성음을 내시는데, 성음이 다양하고 맑고 음이 높았습니다. <조통달>
박초월이 어느 지방에서 공연할 때 춘향전 가운데 옥중가를 불렀는데 귀곡성이 나오니 구경하던 사람들이 그만하라고 요구하였다. 왜냐고 물으니 어느 여자 손님이 얼굴이 노랗게 변하며 ‘무서우니 그만하라’고 말했다 한다. 그만큼 귀곡성을 잘했다. <김명환>
박초월의 성음을 두고 “초월 형님은 목이 좋아서 소리가 대통 속에서 나오는 느낌이 있지요. 특히 맑지는 않으나 고우면서 애원성을 띤 소리 맛이 일품이었지요.”라고 박귀희는 이야기한다. 그 소리는 깊은 가슴 속에서, 그 언저리 어디에선가 나와서 우선 사람의 소름을 끼치게 만들고 특히 애원성을 할 때는 독특한 목으로 질러내기 때문에 빨려드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뱃심으로 밀어나오면서 내는 높은 소리는 맑지는 않으나 고와서 판소리의 특징인 수리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소리의 맛이야말로 소리에 적당히 그늘이 붙고 잘 삭아야만 낼 수 있는 성음인 것이다. 또한 음역, 즉 청이 넓은 그의 소리의 특징은 낮은 소리를 낼 때도 특이한 장기로 여겨질 만큼 잘 나온다. <박초월의 생애와 예술> 중, 유영대
-박초월의 삶과 음악
“열한살 때부터 부모 몰래 소리를 배웠습니다. 학교에도 안 가고 산으로 강으로 숨어다니며 목을 얻기 위해 미친듯이 노래 연습만 했지요.” 좋은 선생 들려줄 테니 소리를 해보라는 아버지의 꾀임에 넘어가 적벽가 중의 새타령을 처음으로 (소리를) 내서 했다가 몽둥이로 되게 얻어맞고 기절해버린 게 12살 때의 일. 침을 맞고 깨어난 그녀를 앉혀놓고 아버지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까지 해 말리려 들었다. 판소리가 그녀의 일생을 유감없이 내주어도 좋을 그런 운명적인 예술이라는 자신이 어디서 생겼던 것인지 모르겠다는 박초월 명창. <대한일보>, 1971년 9월 27일
-우람한 성음, 바른 사설은 일품, 씩씩하고 웅건한 수궁가 애창
박초월씨는 국악계에서 따뜻한 인품을 지닌, 마치 어머니와도 같은 느낌을 일으키는 여성으로 묘사돼 왔다. 그는 자기 자신 국악인으로서 외롭고 힘겨운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국악인들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잘 이해해 국악인들이 서로 돕고 지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이 때문에 국악인의 어려운 문제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불운하게 살다간 선배 국악인들이 후손조차 막연해 제사도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나서 해마다 기일을 정해 합동제사를 올려주었다. 젊은 국악인으로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을 모아 직접 판소리를 지도하거나 장학금을 주어 배우게 하는 등 국악의 보급과 발전을 위해 후배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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