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
요한 세바스찬 바하(Johan Sebastian Bach, 1685-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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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 바하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바흐는 독일어로 '실개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베토벤은 바하를 가리켜 "그는 실개천이 아니라 대해(大海)이다."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바하는 중부 독일 튜링겐 지방의 아이제나하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튜링겐 지방 사람들은 예로부터 부지런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또 그 곳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프로테스탄트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바하 가(家)는 50명이 넘은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이었으므로 튜링겐 지방에서는 '바하'라고 하면 곧 '음악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시다시피 했다. 바하는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다음 해에는 아버지까지 여의어 맏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밑에서 자라면서 형에게 오르간과 쳄발로를 배웠다.
어려웠던 소년 시절 그는 라이켄이라는 오르간 대가의 연주를 듣기 위해 함부르크까지 30마일을 걸어서 강 일이 있었다. 가는 도중 너무 지쳐 어느 여인숙 처마 밑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노라니 2층 식당에서 생선대가리를 내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거라도 먹을 생각으로 얼른 주위를 돌아보니 그 속에서 지폐가 나왔다. 하느님의 은총이라 아니할 수 없는 그 돈으로 소년 바하는 함부르크에 가서 라이켄의 훌륭한 오르간 연주를 감상했다.
결혼한 지 13년만에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바하는 재혼하여 모두 20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다. 그 종 꼭 절반인 10명만이 살아남아 성장했는데, 그 가운데 최소한 네 사람은 후세에 이름을 남긴 음악가가 되었다.
바흐는 청년 시절 상사의 명을 거역한 죄로 한 달 가량 감방에 갇혀 있었을 정도로 뚝심 있는 사나이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대인관계는 원만했으며 가장으로서도 모범적이었다. 젊었을 때 고생을 한 탓이었는지 이제에도 밝아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악장직에 있는 동안 관혼상제용 음악도 많이 써서 아르바이트로 생기는 수입이 짭짤했다.
그 무렵의 가을 어느 날, 그는 친구에게 자못 진지하게 이런 푸념을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요새는 과외수업이 신통치 않아서 않아.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영 죽지 않는단 말이야!"
바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경건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다수의 종교음악, 기악곡, 성악곡 등을 썼으며 특히 푸가 기법의 대가였다. 또한 건반악기의 조율을 시정하여 이른바 '평균율'울 만들어 악곡을 어떤 조로도 전조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그가 이룬 커다란 공적 중의 하나라 하겠다.
만약 서양음악이 일시에 다 없어진다 해도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아 곡집>만 남는다면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할 만큼 그의 음악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
재미있는 클래식 길라잡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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