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얼굴 꽃이 되어 들에 퍼지네"
"세계의 음악가들이 격찬한 조선의 천재음악가,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과 북 양쪽에서 희생된 비운의 음악가, 김순남, 그는 진실로 민족의 해방과 독립, 민족음악 수립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 열정의 화신이었다, 이제 그는 가고 없지만, 그의 높은 정신과 작품은 지금도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적시고 지친 가슴을 쓸어 준다,"
조선에 천재 음악가 '김순남'
현대무용음악〈스파르타쿠스〉를 작곡한 하차투리안(1903∼1978)과 공동으로 창작 발표하고,또한 쇼스타코비치(1906∼1953)와 프로코피에프(1891∼1953)등 러시아 3대 현대음악가들이 "우리가 배워야 할 조선의 음악가"로 평가한 김순남! 미국의 월터 피스톤,지휘자 크세비츠기,그리고 일본의 작곡가 하라타로(原太郞)등이 '조선의 천재 음악가'로 평가하고,세계적인 음악사전《엠게게(MGG)》에 소개된 음악가가 김순남! 그러나 김순남 만큼 비극적인 음악가도 없다.세계사적 냉전이데올로기에 의해 남과 북 각각에서 희생된 대표적 인물이 김순남이기 때문이다.
경성사범 재학 시절 전교생 앞에서 피아노 독주회 모습. <김세원 제공> |
구니다치 대학 유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김순남(맨 오른쪽) |
-동경 유학, 하라 타로를 만나다
1917년 5월 28일 서울낙원동에서 태어난 김순남(金順男)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지도 받았으며,1931년 서울교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이 학교는 음악은 조선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임을 가르쳐 준 곳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졸업과 함께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와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두 군데에 합격했다.경성사범학교(이후 경사)에 진학한 그는 피아노 연주, 테너 독창, 작곡, 경사 취주악대 악장, 음악부장을 하며 영혼을 울리는 첫 창작품〈자장가〉를 남겼다, 또 교내 작곡공모에서 그의〈경사요가〉(경사 기숙사가)가 1등으로 뽑혔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시절 평생 잊지 못할 박 두봉 선생을 만나 민족과 사회현실에 눈뜨게 된다, 절친했던 친구로는 바이올린의 박민종, 정희석이 있었다.
21세되던 1937년 3월 경사를 졸업한 그는 수원보통학교 교원생활을 거쳐 같은 해 9월 일본 동경으로 가서 1938년 4월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 작곡부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서 김순남은 삶에 큰 전기가 된 세 가지 사건을 겪는다, 작곡 지도교수 하라 타로와의 만남, 그의 작품을 일본 창작계가 선정한 것, 2년 뒤 학교를 옮긴 일이 그것이다, 하라 타로는 1937년부터 일본현대작곡가연맹 소속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중진 평론가인 야마네 긴지(山根銀二)와 함께《음악평론》지를 펴 내다가 이 학교 출강 직후 김 순남을 만났다, 그는 저서 에서 김순남을 "재능이 풍부하고 혁명적인 음악가"로 평가했으며, 하라 타로를 만나면서 김순남은 자유 분방한 감상적 음악가에서 탈피한다.
또한 김순남은 자작품〈피아노 소나타 제1번〉이 일본 현대작곡가연맹에 의하여 선정되어 일본음악인 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지도선생이 그만둔 데 다 그가 동맹파업을 주도한사건이 겹쳐 1940년 4월 동경제국음악학원 3학년으로 전학한다, 전학 직후인 5월 24일 동경의 명치 생명 홀에서 신진 피아니스트 와타나베(淚邊正己)의 연주로 그의〈피아노 소나타 제1번〉이 초연된다, 1942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5년째의 동경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 때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후 라서 조선까지 정국이 불안한 상황이었다, 1942년 이후 이건우, 정종길, 한평숙, 이인형, 박용구 등 많은 동경 유학생들이 귀국러시를 이루었다,
김 순남은 귀국 직후 조선총독부 관제단체인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하고 삼선 국민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한다, 동시에 전 서울 음악가들을 규합한 지하음악서클인 성연회(聲硏會)에서 신 막 ·강 장일 ·이 범준 등과 함께 해방을 준비한다, 그가 28세 되던 1944년은 한국 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창작발표회를 한 해
다, 4월부터 경성 여자 의학전문학교 강사가 되었고, 1O월 17일 숙명고녀 출신으로 초등학교교사였던 문 세랑(文世娘)과 결혼한다, 드디어 12월 17일 제1회 김 순남 작곡발표회를 연다, 이때 선보인 작품들은 상 열〉(오장환 시),〈철공소〉(김북원 시)등과 기악작품〈피아노 소나타〉,〈피아노 3중주〉등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울분을 삭이며 창작한 가곡이었으며, 동경 유학생이자 당대 1급 음악가로 부각된 신재덕, 박현숙, 이영세, 윤기선, 이강렬, 박민종, 정희석 등이 출연했다, 이 작품 들은 기능화성법에 의한 조성음 악에서 벗어나 현대음악기법에 의한 작품들로 한국 양악사에 있어 첫 현대작곡 발표회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강장일(테너), 박용구(평론), 이범준(평론)과 교유 한다, 1945년 경성합창단을 지휘하며 창작에 전념 하던 중 그의 유일한 딸이자 후에 방송인이 되는 김세원(金世媛)이 태어난다, 8월 1O일에는 자유의 노래〉를 작곡하고 해방을 준비한다, 이후 모든 사람에게 전설적인 노래가 되고 해방과 민족의 노래로 불린〈해방가요〉가 바로 이 노래에서 나온다,
1917년 5월 28일 서울낙원동에서 태어난 김순남(金順男)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지도 받았으며,1931년 서울교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이 학교는 음악은 조선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임을 가르쳐 준 곳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졸업과 함께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와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두 군데에 합격했다.경성사범학교(이후 경사)에 진학한 그는 피아노 연주, 테너 독창, 작곡, 경사 취주악대 악장, 음악부장을 하며 영혼을 울리는 첫 창작품〈자장가〉를 남겼다, 또 교내 작곡공모에서 그의〈경사요가〉(경사 기숙사가)가 1등으로 뽑혔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시절 평생 잊지 못할 박 두봉 선생을 만나 민족과 사회현실에 눈뜨게 된다, 절친했던 친구로는 바이올린의 박민종, 정희석이 있었다.
21세되던 1937년 3월 경사를 졸업한 그는 수원보통학교 교원생활을 거쳐 같은 해 9월 일본 동경으로 가서 1938년 4월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 작곡부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서 김순남은 삶에 큰 전기가 된 세 가지 사건을 겪는다, 작곡 지도교수 하라 타로와의 만남, 그의 작품을 일본 창작계가 선정한 것, 2년 뒤 학교를 옮긴 일이 그것이다, 하라 타로는 1937년부터 일본현대작곡가연맹 소속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중진 평론가인 야마네 긴지(山根銀二)와 함께《음악평론》지를 펴 내다가 이 학교 출강 직후 김 순남을 만났다, 그는 저서 에서 김순남을 "재능이 풍부하고 혁명적인 음악가"로 평가했으며, 하라 타로를 만나면서 김순남은 자유 분방한 감상적 음악가에서 탈피한다.
또한 김순남은 자작품〈피아노 소나타 제1번〉이 일본 현대작곡가연맹에 의하여 선정되어 일본음악인 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지도선생이 그만둔 데 다 그가 동맹파업을 주도한사건이 겹쳐 1940년 4월 동경제국음악학원 3학년으로 전학한다, 전학 직후인 5월 24일 동경의 명치 생명 홀에서 신진 피아니스트 와타나베(淚邊正己)의 연주로 그의〈피아노 소나타 제1번〉이 초연된다, 1942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한 그는 5년째의 동경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 때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후 라서 조선까지 정국이 불안한 상황이었다, 1942년 이후 이건우, 정종길, 한평숙, 이인형, 박용구 등 많은 동경 유학생들이 귀국러시를 이루었다,
김 순남은 귀국 직후 조선총독부 관제단체인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하고 삼선 국민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한다, 동시에 전 서울 음악가들을 규합한 지하음악서클인 성연회(聲硏會)에서 신 막 ·강 장일 ·이 범준 등과 함께 해방을 준비한다, 그가 28세 되던 1944년은 한국 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창작발표회를 한 해
다, 4월부터 경성 여자 의학전문학교 강사가 되었고, 1O월 17일 숙명고녀 출신으로 초등학교교사였던 문 세랑(文世娘)과 결혼한다, 드디어 12월 17일 제1회 김 순남 작곡발표회를 연다, 이때 선보인 작품들은 상 열〉(오장환 시),〈철공소〉(김북원 시)등과 기악작품〈피아노 소나타〉,〈피아노 3중주〉등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울분을 삭이며 창작한 가곡이었으며, 동경 유학생이자 당대 1급 음악가로 부각된 신재덕, 박현숙, 이영세, 윤기선, 이강렬, 박민종, 정희석 등이 출연했다, 이 작품 들은 기능화성법에 의한 조성음 악에서 벗어나 현대음악기법에 의한 작품들로 한국 양악사에 있어 첫 현대작곡 발표회가 되었다,
이 시기 그는 강장일(테너), 박용구(평론), 이범준(평론)과 교유 한다, 1945년 경성합창단을 지휘하며 창작에 전념 하던 중 그의 유일한 딸이자 후에 방송인이 되는 김세원(金世媛)이 태어난다, 8월 1O일에는 자유의 노래〉를 작곡하고 해방을 준비한다, 이후 모든 사람에게 전설적인 노래가 되고 해방과 민족의 노래로 불린〈해방가요〉가 바로 이 노래에서 나온다,
-해방된 조국, 민족음악에 열정을 쏟다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자 그는 민족음악 수립과제의 선두에 서서 자신을 불태운다, 그는 먼저 조선음악 건설본부의 작곡부위원,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작곡부장,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노래와 기악작품을 창작한다, 1946년 말까지 피아노 반주를 붙여 작곡한 5O여 곡의 노래들은 국내외에서 널리 불렸을 뿐 아니라, 작품 수와 수준 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해방의 노래〉(임 화), 독립 의 아침〉(이주홍),〈건국행진곡〉(김태오),〈남조 선 형제 여 잊지 말어라〉(임화),〈인민항 쟁가〉(임화)등이 그 작품들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피아노 반주가 따르고 새로운 내용으로 민족전통의 색채가 강했으며, 대부분 해방공간의 문사로 통한 문학인들, 특히 임화의 시에 창작한 작품들이다,
김순남은 노래뿐만 아니라 가곡과 기악 작품, 그리고 연극음악도 열정적으로 창작 발표하고, 음악 비평 활동까지 전 방위적으로 전개한다, 1946년 8월 직전에는 2O일만에〈제1교향곡〉(C장조)을 완성한다, 그리고 민족음악반열에 우뚝 솟은 가곡〈산유화〉와〈초혼〉등을 묶어 가곡집《산유화》를 발행(1947)한다, 또한 1946년과 1947년 8월 사이에 교향시적인 작품〈태양 없는 땅〉을 설정식 시 에 작곡하고, 소관현악과 바리톤을 위한 연가곡〈망명〉(임화 시)과〈피아노협주곡〉제1번(D장조)을 작곡 한다,
1948년에는 자작시〈자장가 1〉과〈자장가 2〉,〈자장가3〉(박찬모 시),〈탱 자〉(박노춘 시),〈상열〉(오장환 시),〈철 공소〉(김북원 시),〈양〉(오장환 시),〈진 달래꽃〉(김소월 시) 등을 묶여 두 번째 가곡집인《자장가》시를 출간한다.평론가 박용구는 가곡〈산유화〉를 '국제적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했다, 또 줄리어드 음악학교출신으로 미군정청 문교부 문화담당 참사관이었던 헤이모위츠는 그를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 이자 진정한 창조적 천재'로 평가 했으며, 그의 작품을 작곡가 월터 피스톤, 지휘자 크세비츠기 등 미국 음악계에 소개하여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다,
김순남은 창작활동만 한 것이 아니다, 음악 비평활동과 민족음악과 통일조국 을 건설하기 위하여 노동자편에 서기도 하고, 미군정과 수도경찰청을 방문하여 항의하기도 한다,〈음악〉,〈조선작곡계의 신발족〉,〈악단회고기〉,〈음악의 진실성〉등 비평문을 발표했으며, 경사동창생인 최석두(崔石斗)의 시집 새벽길》(조선사,1948)에 발문을 쓰기도 한다,〈악단회고기〉(월간 백제, 1947년 2월호)에서 그는 "민족 적 양심에 바탕을 둔 자기반성과 진실한 비판, 과학적인 판단을 통하여 창작과 연주활동을 전개 하여야 참다운 민족음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하고, 음악의 정치성을 주장하는 좌파의 계급이론에 대해서도 음악의 독자성과 전문성을 무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이를 역선전하는 정치적 우익음악인들 역시 깊이 반성할 것을 촉구 했다, 이러한 열정적인 창작활동과 문화예술운동은 민족음악을 건설하고자 한 실천적 활동의 결과지만, 정치에 치우친다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향한 반 비판이기도 했다,
그는 조국의 현실 속 에서 파토스를 불태우며 열정적으로 창작했다, 그러나 김순남은 해방공간에서 순탄할 수 없었다, 일제 하 그리고 해방된 조국 에서 민족현실을 외면한 채 음악지상주의를 내세우며 뒤로는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던 당시의 친일 음악인들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친일 음악인들은 김순남을 심사위원 명단에서 제명하거나 제도권 진입을 방해하고 빨갱이로 몰아갔다, 결국 좌익으로 몰린 김순남은1947년 여름 이후 수도경찰청장의 체포령과 함께 활동이 전면 중지되고 지하생활이 시작되었다, 1년 동안 도피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한반도에서 선택적 인 삶의 요구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침내 해방을 맞이하자 그는 민족음악 수립과제의 선두에 서서 자신을 불태운다, 그는 먼저 조선음악 건설본부의 작곡부위원, 조선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 작곡부장,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노래와 기악작품을 창작한다, 1946년 말까지 피아노 반주를 붙여 작곡한 5O여 곡의 노래들은 국내외에서 널리 불렸을 뿐 아니라, 작품 수와 수준 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해방의 노래〉(임 화), 독립 의 아침〉(이주홍),〈건국행진곡〉(김태오),〈남조 선 형제 여 잊지 말어라〉(임화),〈인민항 쟁가〉(임화)등이 그 작품들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피아노 반주가 따르고 새로운 내용으로 민족전통의 색채가 강했으며, 대부분 해방공간의 문사로 통한 문학인들, 특히 임화의 시에 창작한 작품들이다,
김순남은 노래뿐만 아니라 가곡과 기악 작품, 그리고 연극음악도 열정적으로 창작 발표하고, 음악 비평 활동까지 전 방위적으로 전개한다, 1946년 8월 직전에는 2O일만에〈제1교향곡〉(C장조)을 완성한다, 그리고 민족음악반열에 우뚝 솟은 가곡〈산유화〉와〈초혼〉등을 묶어 가곡집《산유화》를 발행(1947)한다, 또한 1946년과 1947년 8월 사이에 교향시적인 작품〈태양 없는 땅〉을 설정식 시 에 작곡하고, 소관현악과 바리톤을 위한 연가곡〈망명〉(임화 시)과〈피아노협주곡〉제1번(D장조)을 작곡 한다,
1948년에는 자작시〈자장가 1〉과〈자장가 2〉,〈자장가3〉(박찬모 시),〈탱 자〉(박노춘 시),〈상열〉(오장환 시),〈철 공소〉(김북원 시),〈양〉(오장환 시),〈진 달래꽃〉(김소월 시) 등을 묶여 두 번째 가곡집인《자장가》시를 출간한다.평론가 박용구는 가곡〈산유화〉를 '국제적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했다, 또 줄리어드 음악학교출신으로 미군정청 문교부 문화담당 참사관이었던 헤이모위츠는 그를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 이자 진정한 창조적 천재'로 평가 했으며, 그의 작품을 작곡가 월터 피스톤, 지휘자 크세비츠기 등 미국 음악계에 소개하여 유학을 주선하기도 했다,
김순남은 창작활동만 한 것이 아니다, 음악 비평활동과 민족음악과 통일조국 을 건설하기 위하여 노동자편에 서기도 하고, 미군정과 수도경찰청을 방문하여 항의하기도 한다,〈음악〉,〈조선작곡계의 신발족〉,〈악단회고기〉,〈음악의 진실성〉등 비평문을 발표했으며, 경사동창생인 최석두(崔石斗)의 시집 새벽길》(조선사,1948)에 발문을 쓰기도 한다,〈악단회고기〉(월간 백제, 1947년 2월호)에서 그는 "민족 적 양심에 바탕을 둔 자기반성과 진실한 비판, 과학적인 판단을 통하여 창작과 연주활동을 전개 하여야 참다운 민족음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하고, 음악의 정치성을 주장하는 좌파의 계급이론에 대해서도 음악의 독자성과 전문성을 무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이를 역선전하는 정치적 우익음악인들 역시 깊이 반성할 것을 촉구 했다, 이러한 열정적인 창작활동과 문화예술운동은 민족음악을 건설하고자 한 실천적 활동의 결과지만, 정치에 치우친다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향한 반 비판이기도 했다,
그는 조국의 현실 속 에서 파토스를 불태우며 열정적으로 창작했다, 그러나 김순남은 해방공간에서 순탄할 수 없었다, 일제 하 그리고 해방된 조국 에서 민족현실을 외면한 채 음악지상주의를 내세우며 뒤로는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던 당시의 친일 음악인들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친일 음악인들은 김순남을 심사위원 명단에서 제명하거나 제도권 진입을 방해하고 빨갱이로 몰아갔다, 결국 좌익으로 몰린 김순남은1947년 여름 이후 수도경찰청장의 체포령과 함께 활동이 전면 중지되고 지하생활이 시작되었다, 1년 동안 도피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한반도에서 선택적 인 삶의 요구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윌북과 모스크바 유학, 하차투리안을 만나다
1948년 7월 말 김순남은 월북하고 만다, 북한은 남조선에서 유명한 음악선생이 왔다면서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해주 음악전문학교 작곡교수,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 대의원을 거쳐 같은 해 8월 말 평양에 진출한 뒤로는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평양 국립음악학교(현 평양 음악무용대학) 작곡학부 학부장, 조선음악동맹 부위원장이자 중앙상임위원 등 음악가로서 북한최고의 서열에 올랐다, 김순남의 월북과 최 정상의 반열에 올랐다는 소식을 확인한 남한에선 김 순남 비판을 서둘렀다, 1949년 12월 3일 민족정 신앙양종합예술제(서울 시민관) 에서 북조선음악동맹과 김순남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고문 낭독이 있었다, 마침내 미소간 냉전체제 속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김순남의 어머니는 동족상잔의 비극아래 총살당한다,
그는 이미 "잘 자거라 나의 아기야/ 눈보라 몰아쳐도 우리아긴 빵끗 웃지" 라는 자작시에 붙인〈자장가 4〉와 "아들이 올 날을 기다리신 어머니" 라는〈고향의 어머니〉(정서촌 시)를 발표했다,〈자장가3>에서 "네 얼굴 꽃이 되어 들에 퍼지네"를 노래하며 떠올렸던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에 김순남은 피눈물을 흘린다, 어머니는 그에게 영혼이자 조국이었으며 모국어이자 민족이었다, 이 밖에 1952년 까지 그는〈인민유격대의 노래〉,〈조선 빨치산의 노래〉,〈추토 가〉,〈맹세〉,〈복구대의 노래〉,〈씨뿌리는 노래〉등과 오라토리오〈승리의 오라토리오〉, 가극〈인민 유격대〉(전4막, 1949.8.평양국립 예술극장초연), 교향악〈영웅 김창걸의 서곡一진격〉등을 창작발표 한다,
1952년 여름, 김순남이 꿈에 그리던 모스크바 유학이 이루어 졌다, 1949년 9월에 이은 두 번째 방문에서 그는 소련 연방작곡가동맹의 추천으로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이론작곡학부 연구생으로 입학 한다, 이미 김순남의 작품을 검토한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 등 작곡가연맹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갖고 있는 음악가'로 평가하고 유학결정서를 북한 당국에 보낸 바 있다, 서울에서 헤이 모위츠의 미국유학 주선도 뿌리친 그였지만,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 등 소련 창작계의 거목을 만나는 것은 그의 오랜 바람이었다, 하차투리안이 그의 작곡 담당교수였고, 둘은 동지적 관계로 발전한다, 김순남의 작품〈빨치산의 노래〉를 유학 직전인 1951년 말에 하차투리안이 새롭게 화성화시켜〈조선파르티잔의 노래〉란 이름으로 발표했고, 하차투리안 자신의 작곡집에도 게재한 직후였다, 그는 모스크바에서〈오보에 독주곡 제1번〉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노래 곡과 기악곡을 창작하여 국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48년 7월 말 김순남은 월북하고 만다, 북한은 남조선에서 유명한 음악선생이 왔다면서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해주 음악전문학교 작곡교수,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 대의원을 거쳐 같은 해 8월 말 평양에 진출한 뒤로는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평양 국립음악학교(현 평양 음악무용대학) 작곡학부 학부장, 조선음악동맹 부위원장이자 중앙상임위원 등 음악가로서 북한최고의 서열에 올랐다, 김순남의 월북과 최 정상의 반열에 올랐다는 소식을 확인한 남한에선 김 순남 비판을 서둘렀다, 1949년 12월 3일 민족정 신앙양종합예술제(서울 시민관) 에서 북조선음악동맹과 김순남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경고문 낭독이 있었다, 마침내 미소간 냉전체제 속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김순남의 어머니는 동족상잔의 비극아래 총살당한다,
그는 이미 "잘 자거라 나의 아기야/ 눈보라 몰아쳐도 우리아긴 빵끗 웃지" 라는 자작시에 붙인〈자장가 4〉와 "아들이 올 날을 기다리신 어머니" 라는〈고향의 어머니〉(정서촌 시)를 발표했다,〈자장가3>에서 "네 얼굴 꽃이 되어 들에 퍼지네"를 노래하며 떠올렸던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에 김순남은 피눈물을 흘린다, 어머니는 그에게 영혼이자 조국이었으며 모국어이자 민족이었다, 이 밖에 1952년 까지 그는〈인민유격대의 노래〉,〈조선 빨치산의 노래〉,〈추토 가〉,〈맹세〉,〈복구대의 노래〉,〈씨뿌리는 노래〉등과 오라토리오〈승리의 오라토리오〉, 가극〈인민 유격대〉(전4막, 1949.8.평양국립 예술극장초연), 교향악〈영웅 김창걸의 서곡一진격〉등을 창작발표 한다,
1952년 여름, 김순남이 꿈에 그리던 모스크바 유학이 이루어 졌다, 1949년 9월에 이은 두 번째 방문에서 그는 소련 연방작곡가동맹의 추천으로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이론작곡학부 연구생으로 입학 한다, 이미 김순남의 작품을 검토한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 등 작곡가연맹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갖고 있는 음악가'로 평가하고 유학결정서를 북한 당국에 보낸 바 있다, 서울에서 헤이 모위츠의 미국유학 주선도 뿌리친 그였지만,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 등 소련 창작계의 거목을 만나는 것은 그의 오랜 바람이었다, 하차투리안이 그의 작곡 담당교수였고, 둘은 동지적 관계로 발전한다, 김순남의 작품〈빨치산의 노래〉를 유학 직전인 1951년 말에 하차투리안이 새롭게 화성화시켜〈조선파르티잔의 노래〉란 이름으로 발표했고, 하차투리안 자신의 작곡집에도 게재한 직후였다, 그는 모스크바에서〈오보에 독주곡 제1번〉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노래 곡과 기악곡을 창작하여 국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비극적 인 삶을 마감한 조선의 천재 음악가
그러나 1953년 북한 당국의 소환장으로 인해 한국 음악가로서 모든 국제적 가능성 이 좌절되고 만다.평양에 귀환 한 김순남은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다, 북한은 한국전쟁 실패 원인이 남로당계 의 반북로당 감정과 애향주의에 기인한 다면서 김순남의 당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남로당계를 기소하고 박헌영과 이승엽 등을 처형했다, 김순남 역시 "조선음악의 당성, 노동계급성, 인민성을 고수하고 적대적 문예사상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대신에 자연주의 외 형식주의 등 부르주아문학예술의 낡은 사상의 음악가"로 비판받았다, 자연히 김순남의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으며,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창작의 권리가 박탈되었다,
창작할 수 없는 김순남은 음악가로서 식물인간이었다, 1953년 소환 이후 반당적, 반인민적 음악가이자 부르주아음악가로 계속 비판 받은 김순남은 1960년대 초반 함경남도 신포시로 쫓겨나 주물공장의 노동자로 전락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 김순남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 창작활동이 재개된 것이다, 노래〈돌아라 사랑하는 기대야〉와〈현실 속에서 배운 것〉이라는 자기 비판 글을 1964년《조선음악》에 발표한 직후였다, 그는 또한 민요 발굴사업에 나서서〈김 매는 소리〉, <나무 베는 소리〉, 베틀소리〉등 11곡을 채보하여《조선민요곡집》제3집에 발표한다, 관현악과합창〈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1965년 작)와 바이올린 독주곡〈이른봄〉(1966년 발표)등이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자, 그는 불사조의 음악가로 복귀한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폐병을 얻은 그는 함경남도 신포, 이원과 단
천을 전전하는 십 수 년의 투병세월 끝에 결국 1983년께 이승의 삶을 마감 한다,
향년 예순 일곱이었다, 김 순남이 삶을 마감한지 5년이 지난 1988년 1O월 6일 음악학연구회 (현 한국 음악학회)는 월례 발표회 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미적, 역사적 평가를 하고 가곡들을 복원 발표했다, 같은 해 1O월 27일엔 정부가 규제된 그의 작품들을 해제했으며, 이후 많은 연구서와 논문, 그리고 《MGG》(Die Musk in Geschite und Gegenwart)를 통하여 김순남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1953년 북한 당국의 소환장으로 인해 한국 음악가로서 모든 국제적 가능성 이 좌절되고 만다.평양에 귀환 한 김순남은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다, 북한은 한국전쟁 실패 원인이 남로당계 의 반북로당 감정과 애향주의에 기인한 다면서 김순남의 당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남로당계를 기소하고 박헌영과 이승엽 등을 처형했다, 김순남 역시 "조선음악의 당성, 노동계급성, 인민성을 고수하고 적대적 문예사상을 반대하여 투쟁하는 대신에 자연주의 외 형식주의 등 부르주아문학예술의 낡은 사상의 음악가"로 비판받았다, 자연히 김순남의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으며,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창작의 권리가 박탈되었다,
창작할 수 없는 김순남은 음악가로서 식물인간이었다, 1953년 소환 이후 반당적, 반인민적 음악가이자 부르주아음악가로 계속 비판 받은 김순남은 1960년대 초반 함경남도 신포시로 쫓겨나 주물공장의 노동자로 전락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 김순남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 창작활동이 재개된 것이다, 노래〈돌아라 사랑하는 기대야〉와〈현실 속에서 배운 것〉이라는 자기 비판 글을 1964년《조선음악》에 발표한 직후였다, 그는 또한 민요 발굴사업에 나서서〈김 매는 소리〉, <나무 베는 소리〉, 베틀소리〉등 11곡을 채보하여《조선민요곡집》제3집에 발표한다, 관현악과합창〈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1965년 작)와 바이올린 독주곡〈이른봄〉(1966년 발표)등이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자, 그는 불사조의 음악가로 복귀한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폐병을 얻은 그는 함경남도 신포, 이원과 단
천을 전전하는 십 수 년의 투병세월 끝에 결국 1983년께 이승의 삶을 마감 한다,
향년 예순 일곱이었다, 김 순남이 삶을 마감한지 5년이 지난 1988년 1O월 6일 음악학연구회 (현 한국 음악학회)는 월례 발표회 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미적, 역사적 평가를 하고 가곡들을 복원 발표했다, 같은 해 1O월 27일엔 정부가 규제된 그의 작품들을 해제했으며, 이후 많은 연구서와 논문, 그리고 《MGG》(Die Musk in Geschite und Gegenwart)를 통하여 김순남은 세계적인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노 동 은 / 중앙대 국악대학 학장, 한국음악회 회장《한국음악론》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삼성문화재단 "문화와 나" 2002년 겨울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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