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eas Gursky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1955

1955년 독일의 라이프찌(Leipzig)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후에 상업과 문화의 도시 뒤셀도르프(Dusseldorf)로 가족들이 이주하면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상업 사진 작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이 사진 수업을 쌓은 그는 1980년 뒤셀도르프의 미술 학교에 입학, 기계 공장 지역을 소재로 하는 사진 작업에 심취한다.
1981부터 7년간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에서 수학한 그는 그곳에서 베허 부부로부터 사진을 배웠고 이를 기초로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 구르스키는 다큐멘터리 사진 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작가 중의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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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다큐멘터리가 작가가의 주장을 영상으로 담고 있다면, 구르스키는 철저하게 자신의 주장을 의식적으로 들어내지 않고, 사진을 보는 관계에게 그 의미를 찾도록 중립성을 지키고 있다.
[Paris, Montparnasse.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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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미국의 뉴 토포그라픽사진의 성격과 닮아 있는 구르스키의 사진은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이른바 "비개성의 미학론" 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의 초기작업인 대표적인 예로 " 건물을 지키는 사람들 " 시리즈를 들 수 있다.
그러나 1984년을 기점으로 하여, 상인들, 수영하는 사람들, 뱃사람들 등을 소재로 한 자유로운 소재의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1990년 일본 여행에서 찍은 동경 증권 시장 사진들을 계기로 20세기의 실생활과 밀접한 소재의 사진들이 그의 작품에서 주류를 이루게 된다.
주로 현대도시의 공공장소에 있는 인간군상을 찍는 그의 사진은 개별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도시환경 속에 위치하고 있는 인간의 삶이 모습을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99 Cent. 1999..]

현대 생활을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 (아파트, 대형 빌딩, 공항, 스포츠 축제, 고급 유명 상표 등) 를 찾아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그는, 동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현대인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 현대" 의 이미지를 사진기라는 냉엄한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렌즈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의 사진들이 이상하게도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연출된 사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나 따분하고 지루하고 의미 없는 현실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찍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어쩌면, 현대의 도시영상을 스펙터클한 구경거리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비현실적이다.
[Library, 1999..]

그의 사진을 보면 마치 옵티걸 아트를 대하는 것처럼 시각적인 혼란을 준다.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기하학적인 패턴의 인공물의 풍경을 와이드한 앵글로 잡아내고 있어 그 현실감은 더 확장된다.
그의 사진 속에는 똑 같은 형태의 반복이 무수히 연속적으로 이루어져서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마치 정보화 사회의 디지털 화된 인간의 익명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의 사진이 매우 흥미로운 것은 풍경하면 떠오르는 자연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서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의 반복적인 패턴의 사건들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의 사진은 달력에 나오는 혹은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틱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류의 풍경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판단하고 있는 풍경은 사실 우리가 실재체험 속에서 받아들이는 현실이기 보다는 가상의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May Day IV. 2000.]

생각해 보자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시 밖을 떠나야 한다. 국립공원의 울타리 안에서 그것도 마음대로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잘 닦여진 정해진 코스의 길에서 벗어 날 수 없다.
혹시라도 꽃이라도 하나 꺾는 날이면, 자연보호법에 위반되는 일이니, 그 속에서 만지고 호흡하고 체험하는 일은 아니다. 정해진 관광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도시 속으로 들어와 TV의 영상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자연을 이해하고 관광기념사진을 통해서 향수 할 뿐이다. 그러니까 현대의 대부분도시인의 삶은 인공물로 뒤덮인 기능화 된 환경 속에서 자신도 그 하나의 디지털 화된 신호와 기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 지구적인 것이며, 개성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 더욱더 그 영역이 축소되고 있다. 똑 같은 유형의 도시가 반복적으로 패턴화 되고 있다는 말이다. 포스트 모던 건축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차라리 숨통이 트인다고 할까!

구르스키는 베허부부의 유형학적인 사진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형학은 유사한 형태의 반복을 통해서 개별적인 존재감을 지워버리고 그 대상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원인적인 분석 그리고 그 대상을 선택하는 작가의 개념적인 동기를 중시하는 철저히 주관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독일 현대사진의 한 전형이다.
[St Moritz, 1991.]

50년대 이후 오토 슈타이너트의 주관주의 사진의 경향에서 과거 아우구스 잔더의 유형학적인 인물사진의 전통으로 의 복귀현상을 보여주는 베허 스쿨의 이념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자율적인 작가의 정신을 투영하는 것으로 보질 않는다.
작가의 의도와 주관성은 읽혀지지 않고 찍혀진 대상만이 반복적인 패턴으로 놓여있다. 그리고 그 대상들은 마치 수집되고 채집된 인상을 짙게 풍긴다. 여기서 우리는 제시된 사진에서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없으며, 나열된 대상들의 개별적인 정체성도 상실되고 있음을 경험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형학적인 사진이 노리고 있는 전략적인 장치이다.
[Tokyo Stock Exchange. 1990.]

하지만, 구르스키는 이 베허 스쿨의 전형적인 사진 스타일하고는 조금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우선 사진을 전시하는 형태도 격자형식의 전시를 하지 않고 한 장 한 장의 대형의 커다란 사진으로 보여 준다.
그 사진의 크기는 보통사람의 키를 훨씬 넘어서는 확대된 사진으로 전시된다. 그 앞에 있으면, 마치 커다란 창문을 통해서 내 앞에 펼쳐진 도시의 광경을 직접 체험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사진 속으로 들어가면, 찍혀진 대상들이 하나 같이 유사하게 닮아 있는 형태 들이 반복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파트나 건물을 한 동 찍었는데 그 아파트 건물의 창문이 똑 같이 격자형태의 배치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대형마트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상품진열장은 똑 같은 물건들로 빽빽이 놓여져 있다. 증권거래소, 대형식당, 수영장의 인파, 등 대중이 많이 모이는 인간들의 군집이 어쩌면, 인간이 만들어 낸 도시의 구조와 똑 같은 지를 보게 된다.
한순간 이러한 이미지를 보면서 마치 기계부속품처럼 혹은 진열된 상품처럼 구조화된 인간의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 놀랍고 무서워진다. 심지어는 내 방의 사적 공간까지 이러한 현상은 침투되어 있다.
[Trainstation in Porto, 1988..]

현대도시의 고밀도 주거유형의 대량보급은 예를 들어 아파트는, 주택공급의 경제성, 생활방식의 편리성이라는 관점에서 환영받았다. 그러나 생활방식의 획일성, 자연으로부터의 고립감, 거주자 개인의 정체감 부재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획일적 주거방식 공간적 배치는 이미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현상이며 ‘사회적 변화’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통로며, 사실 좀더 정확하게는 그 변화에 의해 야기되는, 집합적인 삶의 양상 자체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구조의 도시환경은 똑같은 유형의 유사성으로 확대된다.
이제 스카이라인과 지하 깊은 곳 까지 개별적인 공간은 살아지고, 공공공간을 지배하는 대규모 유통점, 호텔, 사무실과 함께, 그리고 내 방까지 도시적 정체성의 동질화는 인류전체로 확산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인간의 삶을 균질 화 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문화는 표준화되고 있고 또 몰 개성화된다. 구차하게 여러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지금당장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살펴보자, 내 안의 사무실 그 창밖 풍경은 또 어떠한가?
온통 격자무늬, 기하학적인 유형의 반복적인 패턴이 아닌가?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 내부공간은 전체 아파트 단지의 구조와 똑 같고, 심지어 누워 자는 침대며, 걸치고 있는 옷까지 같은 패턴의 유형이다.내일 아침 나는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뉴스를 보며, 똑 같은 음식을 먹고, 똑 같은 시간에 똑 같은 일을 하며, 매일 매일 정해진 격자무늬의 틀 속에서 반복되어진다.
[University of Bochum, 1991.]

구르스키는 사진 속에 표상 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야 실재적인 건물과 도시환경이겠지만, 그것은 또 지겨운 일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이게 그렇게 간단하게 보여 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커다란 구조 속에 틀 지워져 있다는 생각을 잠시 있고 지내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일종의 현기증이다.
그의 사진이 시각적으로 옵티걸 아트를 닮아 있는 것도 이런 심리를 유발하는데 한 몫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종의 심리적인 환각상태에서 자신의 삶을 다른 이들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진을 보고 비현실성을 강하게 느끼는 자는 자신의 삶이 주체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글/ 이영욱 (연변대 예술대학 사진학과 교수) - by 뽀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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