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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The Pianist) <동영상>

이 상용 2009. 5. 8. 16:17
영화 피아니스트 (The Pianist)
 

피아니스트: 아우슈비츠 이후의 영화


 감독 로만 폴란스키 / 원작 블라디슬로 스필만
각본 로널드 하워드 / 제작 로만 폴란스키, 로버트 벤무사, 알랭 사드
촬영 파웰 에델만 / 편집 허브 드 루즈 / 음악 보체크 카일라
출연 애드리언 브로디, 토마스 크레슈만, 프랭크 핀레이 수입 감자
배급 씨네월드 / 장르 드라마 / 등급 12세 관람가 / 시간 148
 
 

유대계 폴란드 감독인 로만 폴란스키는 유년 시절을 나치와 함께 보냈고,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어머니를 가스실에서 잃었다. '스필먼의 회고록'의 담담한 어조에 매료됐던 폴란스키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비명보다는 침묵을 선택했고, 이 영화를 통해 '소리 없는 아우성'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과장된 감정의 표출보다는 피아노의 선율처럼 절제된 감정의 결이 영화의 전편에 흐른다.


 

 

1939년의 폴란드 바르샤바.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공습으로 연주를 중단한다. 폴란드에 진격한 나치는 스필만 가족을 비롯한 유대인들을 바르사뱌의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에 몰아넣고 학살을 시작한다. 그것도 잠시, 게토의 거주민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동시키기 시작한다. 소동의 와중에 지인의 도움을 받아 가족과 떨어져 나와 수용소행을 모면한 스필만. 그는 게토에서의 노동으로 목숨을 연명한다.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스필만은 거리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폴란드인을 발견하고 게토 탈출을 결심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존을 시작한다.

 

 

2002년의 유럽 문화의 풍경은 하나의 공통된 성향을 보여준다. 칸에서는 유대인 피아니스트를 다룬 <피아니스트>에게 그랑프리를 안겨주었고, 한림원에서는 홀로고스트(유대인 대량 학살, 원래는 짐승을 통째로 태워 바치는 번제를 뜻한다)를 경험한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다룬 케르테스의 대표작 '운명'은 최근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무엇이 유럽을 자극하여 2002년 유럽 사회를 홀로코스트의 과거로 회귀하도록 만들었을까. 설득력 있는 가설 중 하나는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를 비롯하여 전세계가 전쟁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유럽 문명을 상징하는 칸과 한림원을 석권한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와 임레 케르테스의 작품은 20세기에 겪어야 했던 가장 끔찍한 시절로 돌아가도록 만든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유대계 폴란드인이자 저명한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그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를 떠돌며 숨어살았다. 영화는 게토를 넘나드는 스필만의 생존기를 다루고 있다. 기아와 공포 그리고 죽음이 그의 옆구리에 항상 붙어다녔다.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의 연출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장기다. 장편 데뷔작 <물 속의 칼>은 물위의 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극단적인 세 인물의 연쇄극을 다뤘고, <비터문> <시고니 위버의 진실> 등에서도 공간과 인물의 제약은 빛나게 묘사된다. <피아니스트> 역시 폴란드의 게토를 중심으로 공간과 인물에 대한 폴란스키의 능숙함을 엿볼 수 있는 영화다.


















 

로만 폴란스키가 <피아니스트>를 선택한 데에는 남다른 이유도 있다. 유대계 폴란드 감독인 그는 유년 시절을 나치와 함께 보냈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어머니를 가스실에서 잃었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의 연출을 제안할 정도로 전쟁에 대한 각별한 기억을 지녔다. 그러나 <쉰들러 리스트>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도 폴란스키가 새삼스럽게 ‘스필만의 회고록’을 집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폴란스키가 반한 것은 스필만의 보고서에 담긴 담담한 기록이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도 이러한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비명보다는 침묵을 선택하는 영화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과장된 감정의 표출보다는 피아노의 선율처럼 절제된 감정의 결이 영화의 전편에 흐른다.






그러나 <피아니스트>가 여태껏 선보인 수많은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의 함정을 넘어섰는지는 의문이다. 나약하게 시대와 타협하는 한 예술가의 체험을 통해 공포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은 걸작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눈을 통해 전후의 참상을 은근히 회피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감동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비판받아 왔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전쟁의 공포를 일종의 우화로 만든다는 점에서 위험성이 있다.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가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만 담았지 홀로코스트를 재현한 장면이 없는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학살의 현장을 재현한다는 것이 과연 진실할 수 있을 것인가.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의 전언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생존자들은 진실되게 증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짜 증인들이다. 역사의 증인들은 가스실에서 사라져간 자들이어야 한다.”

이런 엄밀한 관점에서 보자면 <피아니스트>에서 감동적인 피아노 연주를 통해 독일 장교를 감동시키는 극적인 장면은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 그 장면은 인간애의 갈망과 예술가의 낭만이 뒤섞여 있는 거대한 환영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사실의 증언이기보다는 생존의 감동에 더 많은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피아니스트>는 실패한 또 한 편의 홀로코스트 영화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영화가 역사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희망을 꿈꾼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까.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대로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세기가 와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Chopin, Ballade No.1 In G Minor
from OST "The Pianist"

스필만 역의 에드리안 브로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