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 병마용갱, 화청지 - (중국여행 첫째날)
중국대륙의 배꼽에 해당하는 서안(시안)지방은 좀체로 비가 내리지 않는다던데, 우리 일행이 도착하는 날을 기다렸다는듯 적잖은 비가 내려 여행을을 방해 했고 스케줄을 다 소화하지 못하는 불상사까지 일었다.
관광객들에게 서안 특산물 석류를 팔러 나온 아낙네들이 비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화청지( 华清池 ) ]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왕실 원림(園林)이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좋은 지하 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특히 당나라의 현종과 양귀비가 함께 겨울을 지내던 곳으로, 온천이 유명해지자 현종이 양귀비를 위해 화려한 누각들을 지었다고 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당현종과 양귀비와의 애절한 사랑을 노래한 장편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를 중국 유명 영화감독 장예모가 연출하여 이곳 화청지에서 밤에 공연하는데 무척 화려하다. 입장할때부터 관람객의 카메라지참을 철저히 막고 있어 촬영이 불가능한데, 핸드폰(스마트폰)촬영은 허용된다. 이마저 야간이라 별 힘을 쓰지 못해 촬영본을 유출하는데 어려워 아쉽다.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 762년)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당 태종 이세민 이후, 번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쇠퇴를 이끌기도 한 황제로 며느리이기도 했던 양귀비와의 로맨스는 화제가 되어 장한가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양귀비(楊貴妃, 719년~756년)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다. 이름은 양옥환(楊玉環)이며 현종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도가 지나쳐 안사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경국의 미인이라고도 부른다.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출처 한국위키백과>
절세의 풍만한 미인인데다가 가무에도 뛰어났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백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으로 하여 <장한가>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양귀비 입욕 조각상은 광동성 연산현의 흰색 대리석으로 조각한 높이 3m의 입체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몸에 여우가죽을 걸치고 육체를 반쯤 노출시킨 양귀비가 머리를 숙여 요염한 자태로 천천히 욕탕에 들아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해상탕(海常湯)
보초에 필요한 누각인줄 알았는데, 양귀비가 머리를 말리는 곳이란다. 긴머리를 말리려면 바람결이 좋은 높은 곳이 필요했나보다.ㅋㅋ
발굴 당시 채색된 보병들이었으나, 햇빛에 노출되자마자 3시간만에 색이 산화 됐으며, 그 색을 지키기 위한 기술이 부족해 아직도 발굴하지 않은 보병들이 지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 기술을 이용 아직 발굴하지 않은 진시왕능 등도 함께 발굴하자고 졸라대고 있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서두루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대대손손 진시황으로 먹고사는 그들이 부러울따름이다.
용갱의 인물들은 몸통 따로 머리따로 제작해서 맞춰 완성했다는데, 그 하나 하나가 섬세함에 놀랄뿐이다.
종이가 발명되지 전에는 이런 죽간(竹簡)에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는 했단다.
진시황능 지하모형도, 실제 진시왕능은 기술적인 문제등 으로 아직 발굴되지 못하고 있단다. 내 생애에는 발굴되어야 할텐데...ㅎ
어느 농부가 우물파다 발견했다는 병마용갱이 발견되던 당시 여산의 한가한 모습이다.
이 엄청난 규모의 병마용(兵馬俑)과, 신예무기의 모형들을 크기는 물론 실물과 똑같게 만들어서 그래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선정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무장을 갖추고 각자의 임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는 병마는 완전히 깨진 조각을 발굴하여 이들을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맞추어 다시 만든 것이다. 진(秦)나라 멸망 후, 초(楚)나라 항우(項羽)는 진(秦)나라의 유적을 모조리 파괴하면서 병마용도 산산이 부순 후 갱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지금도 검은 그을음의 흔적이 갱내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갑옷과 투구
출토된 병용은 계급, 연령, 민족 등의 차이에 따라 용모, 복장, 두발모양이 모두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표현의 세심함이 놀라울 정도다. 복장은 물론 갑옷의 못과 갓 끈, 얼굴주름살, 손바닥의 손 금, 신발밑창 무늬까지 선명하게 나타나 있고 말의 경우 이빨에 따라 나이를 추정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또한 병사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임무에 따라 서고 앉은 자세와 방향, 손의 모양에 따라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 병사인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황동마차
진시왕은 업적도 많았지만 무한대의 권력으로 폭정을 휘둘렀던 전제군주가 남긴 상식을 초월하는 역사유산이 지금은 수많은 백성에게 젖줄이 되고 있다. 몇 년 전만해도 허허벌판이던 병마용과 진시황릉 주변은 전세계로부터 몰려드는 관광객을 상대로 지금은 작은 도시로 변모하고 있고 당국의 각종 지원시설 확충공사가 계속되고 있다. <<제리님의 블러그 글 중 부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