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기/즐~ 가곡

윤심덕/ 사의찬미

이 상용 2009. 5. 7. 18:35

 

 

  

 

        윤심덕 - 사의 찬미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에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 알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 알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의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 알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윤심덕 尹心悳 (1897∼1926)

"지난 3일 오후 11 시에 시모노세키(下關)를 떠나 부산(釜山)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


그 승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金水山, 30),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1 정목 73 번지 윤수선(尹水仙, 30)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요, 남자는 김우진이오 여자는 윤심덕이 였다.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1백 40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다.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더라."
[부산 전보]

                              

 

  성악가 배우. 평양 출생.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년여 동안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우에노[上野(상야)]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였다. 23년 귀국하여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가수로 데뷔하였고,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를 지내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 무렵 토월회(土月會)에 가입하여 잠시 연극무대에 서기도 하였으며, 경성방송국에 출연하는 등 대중가수로도 활동하였다. 26년 일본 닛토[日東(일동)] 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한 뒤 귀국하는 연락선에서 극작가인 애인 김우진(金祐鎭)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 정사(情死)하였다. 대표곡으로는 《사(死)의 찬미》가 있다.
 

  윤심덕은 동경 유학에서 성악을 전공 하고 1925년부터 극단 토월회에서 연기를 하였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게다가 동경에서부터 사랑에 빠진 목포 출신의 거부의 아들인 김우진과의 관계와 온갖 소문들 때문에 실의에 잠겨 있었다.


  1926년중순 연극인이며 일측 경성 출장소장을 맡고 있던 이기세가 윤심덕에게 새출발을 위해 레코드 취입을 알선 하였다. 윤심덕은 김우진에게 먼저 일본에 도착하도록 연락을 취한 뒤에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 있는 일동에서 3일간 음반을 취입 하였다, 마지막 날에는 취입 예정에도 없던 노래를 녹음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후에 대단하게 인기를 누리게된 "사의찬미'였다 윤심덕의 자작시 에 이비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 멜로디를 얹어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부른 것이다.


  "사의찬미'녹음을 마치자 윤성덕은 바로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났고 윤심덕은 사랑하는 남자 김우진과 함께 돌아오다가 현해탄에서 동반투신 자살 하였다. 이 정사 사건은 각신문에 대서특필 되었고 마치 윤심덕 자신의 운명을 예감 하기나 한 것같은 가사와 폐부를 찌르듯한 날카롭고도 절망적 인 창법이 어울려 "사의 찬미"가 대유행을 하게된 것이었다,


  이렇게하여 이 노래가 우리 유행가 유행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한다. 사의 찬미’로 대중에게 스타 가수로 떠오른 윤심덕. 그녀는 애인 김우진과 함께 이루진 못한 사랑을 슬퍼하며 몸을 바다에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윤심덕의 죽음은 이렇게 통속적인 미화나 도덕적인 평가로 결론낼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당시 음악의 열정과 대중문화를 태동시키기 위한 욕구로 충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수로 활동하던 중 홀연 중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와 연극계에 투신한 윤심덕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금번 내 생활의 전환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우연히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일찍부터 생각해오던 바가 이번에 실현되었을 뿐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사회에서는 여자란 배워서 가정으로 돌아가 현모양처가 되거나 교사가 되고 간호부, 사무원 같은 것이 되어 말썽없이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특히 배우라는 것은 부량무식한 타락자나 하는 일로 알아 온 이상 나의 이번 길은 갈 곳까지 다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나섰습니다. 오로지 힘을 다하여 새로워지려는 당돌 한 발걸음이 이에 이르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 말은 그녀가 당시 천대하던 배우의 길을 선택하면서 얼마나 당찬 의지를 가졌는가를 보여준다.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하기에 앞서 예술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던 그녀는 노래와 연극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에까지 출연함으로써 대중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