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 사의찬미
윤심덕 尹心悳 (1897∼1926) "지난 3일 오후 11 시에 시모노세키(下關)를 떠나 부산(釜山)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
성악가 배우. 평양 출생.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년여 동안 강원도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우에노[上野(상야)]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였다. 23년 귀국하여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가수로 데뷔하였고,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를 지내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 무렵 토월회(土月會)에 가입하여 잠시 연극무대에 서기도 하였으며, 경성방송국에 출연하는 등 대중가수로도 활동하였다. 26년 일본 닛토[日東(일동)] 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한 뒤 귀국하는 연락선에서 극작가인 애인 김우진(金祐鎭)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 정사(情死)하였다. 대표곡으로는 《사(死)의 찬미》가 있다. 윤심덕은 동경 유학에서 성악을 전공 하고 1925년부터 극단 토월회에서 연기를 하였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게다가 동경에서부터 사랑에 빠진 목포 출신의 거부의 아들인 김우진과의 관계와 온갖 소문들 때문에 실의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윤심덕의 죽음은 이렇게 통속적인 미화나 도덕적인 평가로 결론낼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당시 음악의 열정과 대중문화를 태동시키기 위한 욕구로 충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수로 활동하던 중 홀연 중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와 연극계에 투신한 윤심덕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말은 그녀가 당시 천대하던 배우의 길을 선택하면서 얼마나 당찬 의지를 가졌는가를 보여준다.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하기에 앞서 예술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던 그녀는 노래와 연극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에까지 출연함으로써 대중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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