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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계의 황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마일스 데이비스< 1편 >

이 상용 2009. 5. 6. 18:37

재즈계의 황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마일스 데이비스

 

‘재즈계의 황제’라는 별칭과 함께, 어떤 평자는 ‘재즈계의 피카소’라고까지 예찬하고 있는 마일스 데이비스는 별명에 걸맞게 재즈계에 미친 영향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제한된 지면이라 간략하게 소개하지만, 언젠가는 독자들을 위해 마일스 데이비스의 일대기를 시리즈로 연재할 마음을 갖고 있다.

 

마일스는 모던 재즈의 패러다임을 강력하게 제시한 아티스트로, 재즈 역사를 통해서 보면 마일스만큼 실험적이며 개혁적인 뮤지션은 드물다. 퓨전 재즈의 전형을 제시하기까지 그가 걸어온 족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이채롭다. 게다가 마일스만큼 멋을 아는 뮤지션이 드문 바, 그는 장르의 구별 없이 전음악을 통하여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였다,그러나 마일스가 있기까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뮤지션으로 비밥 재즈의 비조,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를 간과할 수 없다. 또 명편곡자 길 에번스의 끊임없는 조력도 힘을 더하기에 충분하다.

 

일대 전환점된 두 만남,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마일스 듀이 데이비스 3세는 1926년 5월 26일, 일리노이주 앨턴에서 태어났다. 속설에는 25일생이라는 착오도 가끔 보인다. 이 점은 차치해 두고, 27년에 가족이 앨턴에서 아주 가까운 미주리주 이스트 센트 루이스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자라게 된다. 아버지는 치과 의사로, 흑인으로서는 중류 이상의 가정이었으므로 유복하게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마일스는 음악에 관한 흥미와 깊은 이해를 갖게 된다.

 

13세가 되던 해 생일에 아버지로부터 트럼펫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 짓게 된 중요한 계기다.
하이 스쿨에서도 밴드 활동을 하였다. 41년부터 에디 랜들에게 음악을 배웠지만 그가 영향을 받은 트럼펫터는 세인트 루이스파의 클락 테리와 쇼티 베이커였다. 이들 일파는 논 바이브레이션 주법으로 가볍게 부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이 마일스가 컨셉을 갖는 주요한 지표가 되었다. 44년에는 애덤 램버트의 밴드에서 프로로서의 첫 연주를 했다.


그 무렵, 다시 말해 그 해 7월에 그가 그렇게도 동경하던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가 빌리 엑스타인 악단의 멤버로 세인트루이스에 공연차 온 것이다. 얼마나 그리던 일이었나. 가슴이 벅차 오름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관람석 제일 앞자리에서 디지 길레스피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멤버가 병환으로 공석인 3번 트럼펫을 맡아서 연주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마일스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근사한 대역을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으로 마일스는 음악에의 길로 향하는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찰리 파커와 같은 아파트에 살며 음악과 인생을 배워

44년 가을, 마일스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대망의 뉴욕으로 향하여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한다. 첫 1개월은 찰리 파커를 찾아서 돌아다니느라 허송 세월을 보냈으나 결국 같은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파커로부터 음악과 인생을 배우게 된다. 45년 4월 24일에 블루스 가수의 반주자의 멤버로「퍼스트 레코딩」이라는 사보이 레코드의 음반 녹음에 참여하였다. 그로서도 첫 레코딩이었다. 그 해 11월에는 파커, 길레스피, 맥스 로우치 등과 공연을 하며, 본격적인 비밥(Be-Bop) 「빌리즈 바운스」,「나우즈 더 타임」 등을 녹음하며 신인 트럼펫터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46년 4월에는 웨스트 코스트로 가서 찰리 파커의 불후의 명반「다이얼 세션」에 참가하여 길레스피와는 다른 경쾌한 연주로 그만의 독특한 컨셉으로 개성을 발휘했다. 파커는 연주 파트너로 길레스피보다는 열성적이며 지성적인 마일스를 더욱 좋아했던 것이다. 46∼47년에 걸쳐서는 빌리 엑스타인 악단에도 다시 참가하였으며, 파커와의 공연과 레코딩은 훨씬 많이 지속되었다. 마일스는 뉴욕에서 우수한 백인 편곡자인 길 에번스와 조우한다. 집도 가깝고 해서 자주 왕래하며 재즈를 논하기도 하고 연구도 함께 했다.

한때는 마약 중독으로 슬럼프에 빠지기도

47년경부터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지적이며 쿨한 사운드로 된 작·편곡을 중시한 오케스트라를 구상하며 이를 연마하는 한편, 48년에 마일스는 노넷(Nonet·9중주단)을 구성하여 ‘로열 루스트’ 등에 출연했다. 리 카니츠, 제리 멀리건이라는 백인과 존 루이스, 맥스 로우치 등도 추가한 올스타였지만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시도는 49년에 캐피털 레코드를 통하여 녹음이 실현되었는데, 후에 집대성한 것이 그 유명한 「더 버스 오브 쿨」이라는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길 에번스 외에도 제리 멀리건, 존 루이스 등도 작·편곡에 협력하였다. 당시 태드 대머런도 같은 형태의 작은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자신의 작·편곡을 연주하였는데, 마일스는 이들의 연주에도 참여했으나 레코드 판매나 완성도 면에서는 마일스 밴드가 오히려 성공하였다.

이런 마일스의 9중주단(Nonet)의 연주는 사운드상으로는 쿨 재즈로, 음색이나 편곡의 중요도라는 면에서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탄생에 크게 시사한 바 있다.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마일스는 이 시기부터 80년대까지 일관해서 재즈계를 리드하는 존재로 자리 매김하는 것이다. 그러나 50년대 초는 매카시 선풍 등으로 뉴욕의 예술계는 불황에 휩싸이고 흑인 재즈도 활기를 잃게 된다. 마일스도 52년 무렵 마약 중독으로 슬럼프에 빠졌으며, 52년에는 다만 블루 노트 레코드사에 원 세션 정도 밖에 남기지 못했다. 이때가 마일스로서는 최악의 시기라고 그는 술회한 적이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들



Cannonball Adderley Something Else

이 앨범은 사실 타이틀에는 캐넌볼 애덜리가 거명되고 있지만, 그 실상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이다. 이 불후의 음반은 연주인의 면모도 중요하지만, 음악적인 완성도를 높여 준 편곡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일스가 불어 젖히는 뮤트 트럼펫은 가히 일품이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상큼한 야구르트, 바로 그것이다. 58년에 녹음된 이 앨범은 행크 존즈의 피아노에, 샘 존즈의 볼륨 큰 베이스, 쉬지 않는 드러머 아트 블레이스키의 심벌 워킹을 따라 가면 노래의 끝이 보인다. 첫 곡 <오텀 리브스>에서 들리는 마일스의 간결한 뮤트 트럼펫 연주는 차라리 처연하다고 밖에 표현하기가 어렵다. ‘너무나 슬퍼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무색하다. 그러나 캐넌볼 애덜리는 후주에 이러한 말을 한꺼번에 태워 버리고 말았다. 멘탈리티가 강하고 쿨한 사고에서 오는 멋진 연주다. 당시 마일스의 모습이 아련하게 뇌리에 와닿고 있다.

Miles Davis Working

이 작품은 마일스 데이비스가 남긴 프레스티지 레코드사의 마라톤 세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와 컨셉을 자랑한다. 넉 장 모두가 나무랄 데 없는 명반들이지만 이 앨범이 가장 걸출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속내다. 존 콜트레인이 테너 색소폰을 맡고, 리듬 세션에는 헤비급 복싱 선수 출신의 레드 갈랜드가 피아노를 치고 폴 체임버스의 워킹 베이스에, 필리 조 존즈의 키핑 드럼은 가히 환상적이다. 마일스의 극적인 변천을 반영시키고 있고, 연주 시간적으로도 제일 긴 세션이었다는 점이 고려되고 있다. 물론, 들어 보면 알겠지만 독자적인 컬러와 오리지널리티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또 마일스의 편곡 실력도 확고하면서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호감을 갖는다. 특히 뮤트 트럼펫으로 연주한 발라드 <잇 네버 엔터드 마이 마인드>가 압권이다.
Miles Davis Kind of Blue

마일스 데이비스를 대표하는 전무후무한 명작이다. 여기에 실린 모든 곡이 명연주로 모드 주법의 바이블이 된 기가 막힌 음반이다. 참여한 뮤지션의 기량도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때였고, 녹음도 거의 환상적인 테크닉이다. 마일스와 존 콜트레인이 프론트 라인을 맡고, 리듬 섹션은 정제된 피아니즘을 보인 빌 에번스, 당대 최고의 베이시스트 폴 체임버스, 필리 조 존즈를 이은 지미 캅의 타임 키핑은 훌륭한 드러머의 진면목을 보이고 있다. 또한 알토 색소폰에 참가한 캐넌볼 애덜리는 이 시기에 이미 찰리 파커의 재래라는 절찬을 받던 시기로 그의 연주에서 강렬하고 처절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이 앨범의 연주들은 후에 모달 재즈의 패러다임으로서, 북 마크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이 음반은 사실 평자들의 얘기를 배제하더라도 직접 감상했을 때 조그만 마음의 동요가 온다.

Miles DavisThe Birth of Cool

본문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이 음반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불후의 앨범이다. 작곡과 편곡에 참여한 뮤지션은 흑백을 초월한 지극히 재즈적인 컨셉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거의 고인이 되었지만 이 음반의 레코딩 작업에 참여했던 뮤지션은 이름만 들어도 흥분하기에 충분하다. 트럼펫에 마일스 데이비스, 트럼본에 J.J 존슨, 프렌치 혼에 샌디 시겔스타인, 튜바에 존 바버, 알토 색소폰에 리 카니트, 피아노에 존 루이스, 바리톤 색소폰에 제리 멀리건, 베이스에 넬슨 보이드, 드럼에 케니 클락이 포진하고 있다. 결국 당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로드 쇼라고 보는 것도 이 앨범의 흥취를 돋군다고 생각된다. 자니 카리쉬의 <이스라엘>이라는 곡을 세심하게 들어 보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며, 클레오 헨리의 <바플리시티>는 비밥의 고전이 된 명곡이다. 제리 멀리건의 <제루>는 이 앨범 이후 그가 가장 즐겨 연주한 곡이 되었다.

최영수 / 재즈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