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야기/즐~ 클래식

비발디의 히스토리

이 상용 2009. 5. 6. 17:07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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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를 비롯해 협주곡으로 유명한 비발디는 북부 이탈리아의 상업도시이자 음악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바이올리니 스트였다.

그는 젊은 시절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머리카락이 붉었던 까닭에 '붉은 머리 사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야에서는 붉은 머리는 악마나 요부 등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을 미루어 그다지 호의적인 별명은 아니었던 듯 싶다.

과연 비발디는 미사전례를 앞두고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사방을 찾아다니노라면 수도원 으슥한 구석에서 바이올린이나 켜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니, 결코 모범적인 사제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그의 명성은 이미 전 유럽에 퍼져 있었다. 25세 때는 피에타 여자 양육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그곳의 오케스트라는 상당히 수준이 높아 그녀들을 위해 많은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똑같은 곡을 1백 곡이나 써갈긴 사람이다."

이것이 험담가로도 유명한 후세의 스트라빈스키가 비발디를 가리켜 비꼬아 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비발디는 교회용, 행사용 등등으로 몇 개의 악장으로 된 꽤 긴 곡을 평균 2, 3일에 한 곡씩 써야 할 처지였다. 사보가(寫譜家)들이 미처 따라오지 못할 만큼 초고속으로 작곡을 해댄 결과 그는 협주곡만 해도 4백 50곡이나 남겼으니 그게 그거라고 할 정도로 서로가 엇비슷해질 수밖에.

45세 무렵 비발디는 안나 지로라는 여가수를 알게 되어 순회공연까지 함께 다녔다. 당연히 사제로서 미사를 빼먹은 일은 더욱 잦아졌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고울 리 없었다. 베네치아에서의 그의 평판은 갈수록 땅으로 떨어졌다. 결국 그는 고향을 떠나 유럽까지를 전전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극도의 빈곤 속에서 객사한 것은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피붙이라고는 없었던 그를 기다리는 곳이라고는 빈 변두리의 쓸쓸한 빈민묘지뿐이었다.

비발디의 음악은 한때는 잊혀져가는 듯했지만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다시 소생해 세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 실내악단에서는 그의 각종 악곡들을 빼놓을 수 없는 스텐더드 레퍼토리로 삼고 있다.

-재미있는 클래식 길라잡이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