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리(죽산면) 내력
◆ 죽 산 면 (竹山面)
전북 김제시 서부에 있는 면. 면적 36.77 km2. 인구 4,635명 8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월촌동(月村洞), 남쪽 및 남서쪽은 동진강(東津江)을 경계로 부량면(扶梁面)과 부안군 동진면(東津面), 북쪽은 신평천(新坪川)을 경계로 성덕면(聖德面)에 접하며, 서쪽은 동진강 하구의 황해안 간석지이다.
면의 중앙에 명량산(鳴良山:51 m) 등의 낮은 구릉이 있을 뿐, 면 전체가 충적평야이다. 충적평야는 1910~30년대 동진강에 제방 축조와 하구의 간척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때 서포(西浦) 제방을 쌓았다. 구릉은 기반암이 대보화강암이며, 토양은 이들이 심층풍화되어 이루어진 적황색토이다. 충적평야는 배수가 불량한 회색토․충적토로 경지율이 77 %이며 이 가운데 86 %가 논으로, 논농사 중심의 주곡 농업이 이루어진다. 서해안고속국도가 면의 중앙을 지나며, 부안~김제~영광 간 국도가 통과한다.
◆ 역사 및 유래
죽산면은 본래 김제군 반산면 지역으로서 명량등 18개리를 관할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포면, 홍산면, 대촌면 월산면과 부량면 일부와 부안 이도면, 백산면 일부를 합하여 죽산면 이라는 이름으로 김제군에 편입되었으나 1995년 김제시군이 도농시 통합에 따라 현재의 김제시 죽산면이 되었음.
행정구역으로는
죽산리, 홍산리, 옥성리, 종신리, 대창리, 서포리, 연포리, 신흥리 8개리 법정리에 48개 자연부락과 105개반으로 구성되었으며 면적은 3,677ha, 1,728가구에 4,63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죽산리(죽산면) 내력
* 죽산면 홍산리(洪山里)
본래 김제군 홍산면 지역으로 지형이 기러기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여 홍지뫼 또는 홍산 이라 하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외리, 오봉리, 쌍궁리, 내리, 죽산리의 일부와 월산면의 수월리 일부를 합하여 홍산리 라는 이름으로 죽산면에 편입되었다.
1. 마을
㉠. 오봉
홍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이조 중엽에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오봉은 5개의 구룡봉이 있는 한가운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외리
홍산 서쪽에 있는 외리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장씨, 임씨 등이 처음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마을로 이웃 내촌보다 뒤늦게 만들어진 마을이다. 외리 라는 이름은 내촌(당시에는 내리)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졌다. 이 마을은 임씨들이 주축이 되어 저수지를 쌓으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내촌
홍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1040년대 마을이 생겨날 당시에는 비홍락지(飛鴻落地)라는 명당이 있다 하여 홍산촌 이라 불리었다.
그 후 박씨 문중의 한 장수가 임진왜란 때 싸움터에서 전사하여 그의 말과 안장, 칼만 돌아왔는데, 그 말이 죽은 뒤에 묻혔다는 말미동산 , 기러기가 날아가다 쉬어간다는 홍지뫼 , 화초산 줄기의 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으로 내리 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부터 내촌 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 쌍궁
홍산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약 400여 년 전에는 쌍궁나루 , 신촌나루 , 또는 쌍봉리 로 불리었다고 한다.
쌍궁 이라는 이름은 마을 앞산에 있는 두 개의 언덕이 마치 활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 죽산면 죽산리(竹山里)
본래 김제군 반산면 지역으로 산에 대나무가 많아 대뫼 또는 죽산 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칠리, 석산리, 명량리, 죽동리, 자고리, 제내리, 화교리, 대장리의 일부를 합하여 죽산리 라는 이름으로 죽산면에 편입되었다.
1. 마을
㉠. 명량
오랜 옛날 땅이 갈라지고 바닷물이 넘쳐 천지가 진동할 때 부안쪽 계화도 산과 함께 오손도손 정답게 지내던 형제산이 갈라져 헤어지면서 슬피 울었다는 전설에 따라 울영산 이라고도 부른다는 해발 300m 의 명량산 동쪽에 자리한 이 마을은 1600년대에 최씨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면서 뒷동산 이름을 따 울영이 라 부르던 것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명량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명량은 들뫼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자고
죽산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죽동에서 분리되었다.
비교적 이웃마을의 형세보다 작다는 것을 뜻하는 작은 곳 이라 부르던 것이 변음 되어 자고 라 불렀다는데 확실치 않다.
㈂. 석산
죽산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동뫼 라고도 부른다.
지난 날 이 마을 안에 큰돌이 있어 돌뫼라고 불렀는데, 이를 한문으로 석산 이라 쓴 것으로 전한다.
㈃. 죽동
대나무가 많다 하여 대골안 이라고도 불리던 죽동 은 닭머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 중엽(약 400여 년 전)부터 있었던 마을이다.
죽동에는 수령이 300여 년이 되는 왕소나무가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때 충신 마지룡 장군의 손녀가 결혼 3년만에 신행을 가게 되었다. 꿈에 부푼 장군의 손녀는 그 안날 밤에 꿈을 꾸었다. 두 마리의 용이 작은 소나무 아래 웅크리고 있는 것을 치마로 써 가지고 가마 속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신기하게 여긴 장군의 손녀는 꿈이야기를 남편 나인숙에게 들려주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즉시 마 장군의 묘로 갔다. 남편은 그 근처에서 스스로 자란 어린 소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 이 나무를 지금의 자리에다 정성껏 옮겨 심었다.
그 후 마 장군의 손녀 부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두 아들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어 가문을 빛냈다고 한다. 그래서 죽동마을 사람들은 왕소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처럼 여기고 지금도 잘 보호하고 있다.
㈄. 계두
죽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사람들은 닭머리 라는 이름으로 즐겨 부르고 있다.
지형이 마치 닭머리처럼 생긴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이웃 죽동과 같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가칠
죽산 서북쪽 가까이 있는 마을로 조선조 말엽에 생겨난 마을이라고 한다.
가칠 이라는 이름은 마을이 생겨날 때 늘어선 집들의 모양이 일곱칠(七)자 형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배를 매어둘 때 쓰는 닻에 줄이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닻줄리 라고도 불린다.
㈆. 대죽
죽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가칠과 한 마을이다. 그런데 마을이 지나치게 크게 발전하여 행정 편의상 두 마을로 나누면서 죽산의 큰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죽 이라 하였다고 한다.
㈇. 죽산
해발 27.5m의 죽산면 중심부에 자리한 이 마을은 죽산면의 행정 중심지로서 소도시 형태로 발전되어 초. 중. 고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이조 중엽에 만들어졌다고 전하는 마을 동산에 100여 년 전 동학군이 무기를 만들었다는 대숲이 우거져 대뫼 라 불렀는데, 행정구역 개편 때 죽산 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마을을 나누어 죽산 1.2.3구로 부르기도 한다.
2. 산
㈀. 명량산
김제시에서 서쪽으로 10km쯤 떨어진 죽산에서 다시 2km쯤 서해바다 쪽으로 가면 바로 눈앞에 확 트인 바다가 있다.
이곳은 옛날에 바닷물이 밀려들던 갈잎 속의 진흙땅이어서 산이라고 할 만한 산이 없었다. 이처럼 산이 귀한 이곳에 마치 누에처럼 길게 뻗어있어 누에산 이라고도 불리는 명량산이 놓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아득한 옛날 부안군 계화도산과 형제산이 나란히 있어 오손도손 정답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다정했던 형제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다. 바다에 폭풍이 불고 거센 풍랑이 일어나 형제는 조난을 당한 채 둥둥 떠다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얼마를 떠다니다 형은 다행히 그 자리에 다시 내려앉았지만 힘이 약한 동생은 여기 죽산까지 떠밀려 내려오고 말았다.
형의 곁을 떠난 동생은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울고 또 울다가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자리에 내려앉았다. 이 산이 바로 명량산인데, 풍랑 때문에 형을 잃고 울었다 하여 울영산 이라고도 부른다.
명량산 꼭대기에 큰 바위가 있다. 그 바위를 빙 둘러가며 발자국이 있는데 이 발자국을 사람들은 장군 발자국 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지에 가 확인해 보니 장수(힘센 사람) 발자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것 같았다.
그 바위 아래를 사람이 걸어가면 쿵쿵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발로 굴러보면 상당히 크게 울린다. 그래서 울엉산 이라고 했다는 사람도 있다. 북혈(鼓穴) 또한 그 바위에 틈이 있는데,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남북으로 길게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울영산 서쪽에 굴이 있어 그 굴에다 불을 피우면 500m 이상 떨어진 이 장수바위 틈으로 연기가 나왔다고 한다. 한편 사기에는 고려말의 명장 최영 장군이 탐라국(현 제주도)을 정복하고 의기양양하게 서울인 송도로 개선할 때에 이곳 명량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단을 만들어 천신에게 봉고제를 모신 사실이 있다고 적혀 있는데, 이 산 위에는 지금도 그 때 쌓았다는 제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명량산 꼭대기에는 1939년 대 가뭄 때 죽산면민은 말할 것도 없고 인근 면 주민들까지 참여하여 지냈다는 기우제의 흔적도 남아 있다. 또 명량산 꼭대기에 묘가 있었는데, 그 묘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인근 면(죽산, 성덕, 월촌, 진봉 등) 주민들이 그 묘를 파내야 비가 온다고 믿고 묘를 파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경찰(일제의 순경)의 제지로 결국 묘를 파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